[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암울한 시대를 한탄한 시인 오일도와 그의 詩(영양)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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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20   |  발행일 2013-05-20 제20면   |  수정 2021-06-02 17:21
아지랑이처럼 불분명하게 아른거리는 ‘내 소녀’

◆ 시리즈를 시작하며…

2010년부터 스토리텔링 시리즈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를 연재하고 있는 영남일보는 올해도 경북 곳곳에 산재해 있는 스토리를 찾아 떠납니다. 흥미있는 이야기는 흥미있는 삶을 드러냅니다. 옛 이야기는 오늘의 이야기로 되살아나고, 다시 내일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곳의 이야기는 저곳의 신화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해학적이며 때로는 교훈적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서사시대의 가장 강력한 감성 유혹 장치라고 말합니다. 경북지역은 그런 이야기들이 살아오고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삶만큼 널려 있는 곳입니다. 수년간 영남일보가 이야기를 찾아 경북 곳곳을 다니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꿈의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지금도 생성하고 꿈틀대는 그 힘을 다시 불러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새로운 공감과 동력을 얻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올해 시리즈 역시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대거 참여해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시리즈 첫 회는 영양 출신의 시인 오일도의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암울한 시대를 한탄한 시인 오일도와 그의 詩(영양)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 있는 오일도의 생가. 조선시대 경북북부 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91년 경북도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됐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암울한 시대를 한탄한 시인 오일도와 그의 詩(영양)
감천마을 입구에 있는 오일도 시공원. 시인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지하실의 달’을 새긴 시비가 인상적이다.
#1.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같은 그리움의 생애

한 소년이 있었다. 깊은 산골의 오래된 마을 복판에 그의 집이 있었다. 네모로 지은 한옥의 중문을 나서면 마당이 있고, 마당에 서면 중문과 붙은 사랑채가 보였다. 소년은 사랑채에 걸린 현판을 보며 ‘국, 운, 헌(菊雲軒)’이라고 글자를 하나하나 눈으로 짚으며 읽었다. 그럴 때는 으레 아버지가 나타나 아들의 모습을 대견한 듯 바라보곤 했다.

“희병이가 제법 한문을 읽는구나.”

“국운헌이 무슨 뜻이에요? 국화가 구름처럼 피어난다는 뜻인가요?”

아버지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 이 집은 너의 할아버지, 시(時)자 동(東)자 어른이 지었단다. 사랑채를 국운헌이라 하는데, 한문에서 따온 좋은 구절이지. 옛날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할아버지(오수눌)의 호가 국헌(菊軒)인데, 그 호와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소년 희병은 이런 가계에 대한 설명이 싫지 않았다. 윗대 어른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들어왔어도 늘 신비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1901년, 이곳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크지는 않지만 아주 정취 있는 취락지인 감천마을은 낙안오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오씨들을 두고 어른들은 ‘국헌 수눌파(受訥派)’라 했다. 해주오씨의 한 파다. 국헌 오수눌은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공적이 컸다. 영해부사의 창의에 가담해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명을 참수했고, 당시 피란하여 의주에 있는 선조임금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수개월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오기도 했다. 희병의 아버지 오익휴는 아들에게 이런 조상들의 행적을 자랑스럽게 자주 얘기했다. 천석의 거부였던 오익휴였다. 덕분에 희병은 늘 넉넉한 가풍 속에서 지냈다.

소년은 마당을 가로질러 팔작지붕이 날아갈 듯 솟은 대문을 나와 마을 골목을 뛰어서 낮은 구릉들이 울멍줄멍한 언덕 위에 섰다. 거기 소녀가 있었을까? 어쩌면 소녀가 그 언덕에서 쑥을 캐면서 소년에게 노래라도 불러주었을까? 그래서 소년은 자주 그 언덕에 올라 나무 아래 서서 소녀와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나중에 ‘일도(一島)’라는 호를 이름 대신 쓰는 시인이 되는데,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가 ‘내 소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를 두고 그가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독자들은 추측하기도 한다.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박사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봄의 서정과 그리움이 애틋하게 떠오른다. 3연5행의 짧은 시이면서도, 그 압축미가 돋보여서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말없음표의 점선만으로 한 행을 처리한 2연은 공간적 여백을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에 맡기는 아주 효과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시를 두고 ‘최소한의 단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 있다’고 말한다.

빈 가지에 걸린 바구니를 보며 행방을 알 수 없는 소녀를 떠올린다. ‘빈 가지’는 잎과 꽃이 진 가지이면서 ‘빈’이라는 말로 인해 어떤 부재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부재의 주인공은 ‘내 소녀’다. 그냥 소녀가 아니라 ‘내’ 소녀라는 점이 강조되어 부재의 애틋함이 아주 진하게 느껴진다. 2연의 길게 이어진 말없음표는 화자와 소녀에 대한 상상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장치같다. 그런 가운데 아지랑이가 소녀를 떠올리는 가지 앞에 어른거린다. 아지랑이는 박사처럼 얇은 막으로 가려진 채 흔들린다. 이 시에서 구체적인 것은 나뭇가지와 거기에 걸린 바구니뿐, 그걸 통해 떠올리는 소녀에 대한 생각은 뿌연 ‘박사의 아지랑이’처럼 불분명하게 아른거릴 뿐이다.

박사는 생견(生絹)으로 얇게 짠 옷감을 뜻한다. 애틋하지만 먼 그리움으로만 떠오르는 소녀에 대한 아련함이 박사라는 말을 통해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이 시는 읽는 시라기보다는 보는 시로서의 선명성을 인상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박사’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을까? 같은 영양 출신으로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는 조지훈의 시에도 이 말이 나온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 ‘승무’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라 했다. ‘승무’는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 12월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오일도의 ‘내 소녀’는 1935년 ‘시원’ 10월호에 발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일도가 쓴 이 말을 조지훈이 의식하면서 썼을 수도 있겠다 싶다. 선후배 간 동향의 두 시인이 서로 교감을 통해 이 말을 수용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향의 두 시인이 다 애틋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그러한 감정을 압축하는 공통된 정서의 말이 ‘박사’라는 점이 신기하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암울한 시대를 한탄한 시인 오일도와 그의 詩(영양)
시인 오일도의 생가 사랑채에는 국운헌(菊雲軒)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오일도의 할아버지 오수눌의 호가 국헌(菊軒)인데, 현판에 쓰인 글은 호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2.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하다

희병은 14세까지는 이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는 않았다. 1922년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했다. 대학 때부터 그는 시작에 힘을 썼다. 그의 등단 시기는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를 발표한 것을 기점으로 꼽는다.

귀국 후 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문학에의 열정이 더 컸다. 어느 날 그는 맏형 희태를 찾았다.

“형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돈을 좀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잡지를 내려고 합니다.”

형 희태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개화기 교육에 큰 열정을 쏟았다. 고향에서 사립 감호서숙을 세웠고, 도평의원과 연초조합장 등을 역임하여 지역발전에 힘썼다. 나중에는 서예가로 크게 명성을 얻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동생을 사랑했다.

“그래, 무슨 잡지를 낼 건데?”

“시 잡지입니다.”

“시?”

희태는 의아했으나 동생이 평소 시를 써온 걸 염두에 두어온 터라 흔쾌히 돈을 마련해주었다. 당시 시인은 문사(文士)의 으뜸으로 여겨지던 때라, 집안에 시인이 한 사람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 여기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 돈으로 1935년 2월에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시원’은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해 12월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됐다. 이 시기에 그는 이헌구, 김광섭 등과 가까이 지냈다. 1936년에는 ‘을해명시선’과 시인 조지훈의 형 조동진의 유고시집 ‘세림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시와 번역시를 꽤 남기기도 했으나, 한 권의 시집도 내지는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그는 자주 일제의 통제를 절감해야만 했다. 견뎌보려 했으나 옥죄어오는 일제의 마수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낙향하여 절필하는 무언의 저항을 택했다. 1942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칩거가 길었다. 광복이 되자 다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다. 결국 간경화증이 그를 덮쳤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3. 암울한 시대의 항변과 한탄의 시들

희병이라는 본명보다 일도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시인 오일도는 영양이 자랑하는 시인이다. 그를 기리는 일들이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그의 고향 감천마을에는 오일도의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돌에 시를 새긴 시비들이 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그의 형상을 조각한 브론즈도 앉혀놓았다. 나지막한 둔덕들이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가운데 예쁘게 조성된 시공원은 봄기운이 무르익어 노란 민들레꽃이 자욱하게 흩어져 있는 게 인상적이다.

한국시사에서 그의 위치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남긴 시 분량이 적은 데다, 생전에 시집을 묶지 못했다. 그래서 작품보다는 시잡지 ‘시원’의 발간을 통한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미를 둔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시는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나태주)’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가 주조를 이룬다. 낭만주의의 기조에다 애상(哀傷)과 영탄(詠歎)의 정서가 흥건하다. 지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며, 그런 만큼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이 돋보인다. 특히 ‘내 소녀’를 비롯한 짧은 시가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시각을 잘 드러낸다. 다음의 ‘5월 화단’도 짧으면서도 감각적으로 인상적인 시각을 드러낸 시로 꼽힌다.



5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화단
하로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월계의 꽃조각이 환각에 가물거린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암울한 시대를 한탄한 시인 오일도와 그의 詩(영양)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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