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 목숨 끊어 일제에 저항한 이명우·권씨 부부(안동)

  • 입력 2013-06-10   |  발행일 2013-06-10 제13면   |  수정 2021-06-02 17:49
“당신과 함께 가기에 그 두려움도 복으로 받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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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우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비통사(悲痛辭). 나라와 부모를 잃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자정순국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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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순국의 길을 택한 권씨 부인은 한글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 부부의 도리’라며 생을 마감하는 이유와 의지가 적혀 있다.

 

◆Story Briefing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우리 국민은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중에서 자정순국(自靖殉國)이 가장 극단적이고 강렬한 항거였다. 자정순국은 일제의 침략이 왜 부당한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증명한 항쟁이다. 나라를 빼앗긴 이후 순국의 길을 택한 이는 전국에서 90명에 달했으며, 목숨을 건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0년 다시 순국자가 나왔다. 안동 사람 이명우와 그의 아내 권씨 부인이었다.

퇴계의 후손이었던 이명우는 갑오개혁 전 마지막 과거시험에서 진사가 된 인물이다. 고향 안동에서 부모를 모시며 처사로 살아가려 했던 그에게 경술국치의 비보는 날벼락 같았다. 여기에 집안사람인 이만도와 이중언이 단식에 들어가 결국 순국했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이때 이명우는 자신도 순국의 길을 택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종 황제와 부모가 살아 있어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향 안동을 떠난다. 결국 충청도로 이사한 지 3년 만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치르고 고종마저 승하하자 자정순국을 결심한다. 남편의 뜻을 헤아리고 있던 부인 권씨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1920년 12월19일(음력) 이명우와 권씨 부부는 독약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1918년 12월20일(음력)에 서거한 고종의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저항한 안동의 이명우·권씨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의 마지막 날 모습을 이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


#1. 이것은 의리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촛농이 지글거리면서 푸른 불꽃을 한껏 피워 올렸다. 이명우와 권씨 부인,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검은 파문이 일렁였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이명우는 집중했다. 평소 말을 아끼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의 마지막 목소리를 한 음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허나 당신과 함께 가기에 그 두려움도 복으로 받으려 합니다.”

이명우의 가슴께로 묵지근한 울림이 지나갔다. 아내가 마지막을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돌덩이처럼 쏟아져 내리던 비통의 무게감을 이명우는 아직도 느끼고 있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시오. 뜻을 돌이킨다 해서 내가 당신을 탓한다거나 원망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나는 확고하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경술년 이후에도 내 한 목숨을 부지한 것은 오로지 양친께서 모두 살아계시기 때문 아니었소. 양식 준비를 비롯해 자식으로서의 책임과 도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효심이 넓고 깊은 이명우였다.

젊어서의 어느 날이었다. 도적 떼가 나타나 마을을 약탈하다가 이명우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명우가 혼자서 무리의 소굴로 찾아갔다.

“아버지를 풀어주게. 대신 나를 잡아 두면 되지 않겠는가.”

“기세는 가상하오만, 그리 쉬이 내줄 거면 애초에 잡아오지도 않았소. 허니 두 사람이 함께 살아서 가려거든 몸으로라도 때우고 가시오.”

그날 이명우는 몸이 엉망이 될 때까지 맞고 또 맞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다른 일도 있었다. 벗이 찾아와 이명우에게 권했다.

“세상이 바뀌어 과거가 폐지되는 바람에 벼슬길이 멀어진 줄 알았더니, 다행스럽게도 추천을 받아 관리를 임명한다 하는군. 자네, 진사가 된 지도 제법 되었는데 방법을 궁리해 봄이 어떻겠는가?”

“알고 있네. 허나 그리 되면 집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들었네. 발령지가 어디로 될지 모른다 하더군. 그러니 그것은 내게 불가하네. 부모님 곁을 지키는 것이 출사보다 중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네.”

#2. 슬프고 슬프다, 피눈물이 흐르누나

이명우의 얼굴에 극심한 고통의 흔적이 나타났다.

“하여 분노를 머금고 아픔을 참고, 그렇게 견딘 세월이 벌써 십 년이나 되었소. 이제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상황의 종상도 끝났으니 운명을 결정할 때가 온 것이오.”

“예. 저 또한 더는 번민이 없습니다. 의리는 제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명우는 아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열여덟에 네 살이나 어린 자신에게 시집와 서른다섯 해를 더불어 온 사람이었다. 모든 고락이 그 세월 안에 있었다.

“당신이 품고 계신 의리가 나라에 대한 충의라면, 제가 지키려는 의리는 남편에 대한 도리입니다.”

권씨 부인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 사람이었다. 을미의병 때의 안동 의병대장 권세연이 닭실 사람이었고, 3·1독립선언 당시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파리장서’를 보낸 유림의 일원인 권명섭·권상원·권상위가 또 그러했다. 중국의 쑨원과 우페이푸에게 보낼 제2의 독립청원서를 지은 권상익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책무를 외면하지 않는 집안이었고 마을이었다. 그것은 아녀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비록 변변한 이름도 없이 ‘권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의 권성(姓)으로만 기록될 것임에도….

아내가 지키려는 의리와 도리가 이명우는 느꺼웠다.

“고맙고 장하시오.”

이명우는 아내에게 무슨 말이든 더 해주고 싶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보니 아내는 가족이라기보다 동지였다. 하지만 이명우는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아내는 다 알 것이라고 믿었다.

펼쳐진 종이 앞에 이명우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성심과 성의를 다해 적어 가기 시작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슬프고 슬프다. 이 몸 어디로 돌아갈까. 황제의 단과 부모님 빈소에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니, 들어갈 땐 오동지팡이가 나와 보니 죽장이구나. 불충불효하니 어찌 신하와 자식이라 하겠는가. 십여 년 분을 품고 부끄러움 참아내니, 어찌 복수할지 하늘의 벌을 기다릴 따름이라. 십여 대를 은혜 받았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 하거늘. 서산으로 올라갈까, 동해에 뛰어들까, 삼 년을 다하니 피눈물이 흐르누나. 내 임금께 돌아가리라.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꼬.

#3. 들어라, 형제여! 보아라, 아들아!

비통사(悲痛辭)를 마친 이명우가 다른 종이에 ‘경고(警告)’를 벼락같이 적어 갔다.

동포들아, 나의 슬픈 말을 들어 보라. 종사는 어디 있는가. 웅담을 맛보고 피눈물로 옷깃을 적신 지 무려 십 년이라. 돌아보니 무상한데, 재주는 성글고 힘은 한 가닥 실과 같구나. 뜻을 같이하면 바다도 메울 수 있고, 우공은 산도 옮기었거늘. 죽음만이 복수할 수 있으나 베풀 계책은 없구나. 누가 원통하지 않으랴. 종실, 주친을 협박하였으니 아들 된 자 무리를 이룬 자 누가 힘쓰지 않으리. 곧음과 어짊을 방패로 하여 의기를 내걸며, 악인은 반드시 벌하고야 만다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태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며 (나라를 되찾을) 큰 공적을 세우라.

적막이 내려앉았다. 시간조차도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눈을 감고 앉았던 이명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갑시다.”

권씨 부인이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약이 담긴 사발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촛불의 불투명한 빛이 약의 색을 더 어둡게 비추었다.

“바꽃 뿌리를 다렸습니다. 약이 강하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명우가 일어섰다. 부인도 함께 일어섰다.

하직 인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황제의 단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고, 다음으론 부모님의 묘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섰다. 마주한 얼굴로 따뜻한 눈길이 오고 갔다.

이명우와 권씨 부인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던 혼례청에서의 절이 첫 절이었다면, 이것은 부부 사이의 마지막 절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다해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권씨 부인이 남긴 글은 이러했다.

아해야, 삼형제 보아라. 네게 유서로 부탁할 말이 허다 많건마는 어둑 정신 수습 못, 단문 졸필 대강 부탁 일다. 너 어르신께옵서 평생에 의리 가득 하시와 이제 뜻과 같이 이루실 듯하시니 나도 같이 따르리라. 노소 간에 생사가 그 한 몸에 달렸으니 부부지의는 군신지의와 일반이라.


이명우는 생을 마감하면서 ‘비통사(悲痛辭)’ ‘분사(憤辭)’ ‘경고(警告)’를 비롯해 자식들에게 ‘유계(遺戒)’를 남겼다. 나라를 잃고 10여년 동안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충의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후손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고 백성과 신하 된 도리를 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권씨 부인도 아들 삼형제와 친정동생·시숙부·시숙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한글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부부와 군신의 도리가 같은데 남편이 충의의 길을 떠나니 부부의 도리를 따라 함께 자결한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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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및 도움말= 김희곤 저 ‘안동 선비 열 사람’, 심상훈 논문 ‘忠義의 길, 夫婦의 길을 함께한 순국자정’,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공동기획:pride GyeongBuk 



 

 

 부부가 같은날 동시 순국 전국에서 유일

 
이명우·권씨 부부가 순국한 곳은 계룡산 남동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이 그곳이다. 1912년 봄 이명우는 고령의 부모와 함께 고향 안동을 떠난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속리산 아래 갈평리(지금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였다. 하지만 이사한 지 3년 만인 1915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3년상을 마친 뒤 부부는 다시 계룡산 남동쪽에 있는 봉서리로 이사한다. 이 마을에서 부부는 자정순국의 길을 택한다.

이명우·권씨 부부의 순국 소식은 고향 안동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사해서 머물렀던 충청도 지역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장례식에는 무려 1천여명이 참석해 부부의 뜻을 기렸다. 특히 충청도 지역 유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부부의 순국 사실은 한동안 관련 자료가 없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안동지역에는 10명의 순국지사가 있었지만 이들 부부만 애국지사 포상에서 늘 누락됐다. 그러던 중 2009년 2월, 손자인 이일환씨가 ‘비통사’와 ‘유계’ 등 부부가 남긴 자료를 공개하면서 새롭게 조명받게 된다. 이듬해인 2010년 정부는 3·1절을 맞아 이명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전문가들은 “부부가 같은 날 동시에 순국한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특히 여성이 자결하고 한글 유서를 남긴 것도 처음 있는 일로, 유서 자체의 국문학적 사료 가치 또한 크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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