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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 있는 동상.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진 운강의 곧은 결기가 느껴진다. |
◆ Story Briefing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은 문경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지자, 분을 삼키지 못하고 문경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해 일제에 저항했다. 1907년 정미의병 때는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돼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08년 7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붙잡힌 뒤, 그해 10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모두 22명의 호국인물을 선정해 흉상을 세워 기리고 있는데, 운강이 포함돼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6편은 문경 출신 의병장 이강년의 치열했던 삶과 그의 항일투쟁사를 다뤘다.
#1.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다
서대문형무소 안은 어둡고 서늘했다. 추위가 찾아드는 시월 중순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쇠창살로 막힌 창문 사이로 죄수들의 밭은 기침소리와 병자의 무거운 신음이 간간이 새어들었다. 이층 벽면에 난 작고 네모진 환기창에 푸른 기운이 비치는 걸 보면 조만간 아침이 밝아올 터였다.
좁은 독방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맨 상투바람의 50대 남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혹독한 수인생활로 인해 몹시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엄이 감돌았다. 그는 구석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한지 한 장과 붓과 벼루, 그리고 그릇에 담긴 물을 가져왔다. 차가운 바닥에 정좌한 그는 곧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수양이나 하듯 묵묵히 먹을 갈던 그의 눈길에 문득 깊은 회한이 스쳐갔다. 지나온 어린 시절을 회상이라도 하는 것일까.
이강년(李康秊). 어릴 적의 자는 낙인(樂仁)이었고, 호는 운강(雲崗)이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오랜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국정이 문란하던 1858년(철종 9) 12월이었다. 문경 가은읍 완장리에서 그는 태어났다. 불운하게도 두 살 무렵 부친을 여읜 그는 백부의 집에서 자라야 했다. 여러모로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성장하면서 남보다 훤칠한 기골을 드러냈고, 장중한 외양만큼이나 불의와 부정에 굴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를 두고 주위사람들은 장래 나라를 구할 장군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주위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1880년 스물둘 젊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곧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조정은 그야말로 난국의 분란과 권력의 몰염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점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격랑의 역사는 그를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1894년경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분연히 동학군에 투신했다. 그러나 물밀듯 밀려드는 외세에 의해 오백 년 종묘사직은 힘없이 기울었고, 끝없이 타오를 것 같던 동학혁명의 불길도 일본군과 결탁한 관병들의 공세로 안타깝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얼마 뒤인 1895년(을미년), 나라의 운세가 기운 것을 기화로 일본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자국의 낭인들을 궁궐에 침입하도록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불까지 질렀던 것이다. 여기에 김홍집 친일내각은 유길준 내부대신을 시켜서 전국에 단발령까지 내렸다.
평소 누구보다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졌던 그로선 거듭되는 일본의 흉악무도한 만행에 심한 의분을 느꼈다. 그는 왜적을 소탕하기로 하늘에 맹세하고 사재를 털어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먼저 왜적들의 앞잡이로 고을 양민들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비롯한 3명을 생포하여 시장터에서 그들의 반역행위와 죄상을 백일하에 들추어내어 효수하였다.
뒤이어 제천으로 간 그는 당시 의병대장이었던 의암 유인석에게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하였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던 농민과 유생들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를 이끌던 유인석은 동학전투에 참가하여 실전경험까지 갖춘 그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그는 문경전투와 수안보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문경의 조령을 장악하고 제천대회전(堤川大會戰)에 임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전세는 의병들의 열세였다. 관군에 패한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요동으로 향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가려던 그는 영월에서 진로를 차단당한 채 소백산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후로 아관파천과 관군의 회유, 보급물자 조달의 어려움이 겹치면서 그의 의병부대는 해산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광무황제의 밀서를 받고…
단양 금채동에 은거한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틈틈이 후일에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를 대비했다. 의병부대의 전술과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의병의 조직도를 비롯하여 진격과 후퇴요령까지 기록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예견은 헛되지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맛본 일본은 마침내 그 흉악한 강제합병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례 광무황제를 협박하고,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1907년(정미년) 3월.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던 그는 몸을 떨치고 일어나 원주와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제2차 의병전에 돌입했다. 그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갖추고 군세를 확장하였다. 그해 7월에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의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을 위시한 여러 의병들과 연합하여 적군 500여 명을 토벌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당시 외세를 내몰기 위해 내정개혁을 실시했던 광무황제는 이 전투소식을 들은 뒤 곧 그를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는 직위인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했다. 아울러 그에게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의병으로 선발, 소집하는 권한을 주었고, 만일 그의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일지라도 파직하고 내쫓으라는 밀서를 내렸다.
한편으로 제천에서의 승전보를 듣고 의기충천하여 각지에서 몰려든 40여 의병진은 제천에서 그를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준비된 사람만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했던가. 이후로 여러 전투에서 있었던 그의 활약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제천 추치와 죽령에서 적 400여 명을 사로잡고, 단양 고리평에서 80여 명,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도 적 100여 명을 사로잡는 뛰어난 전과를 올리는 등 의병부대의 선봉에서 거듭 승리를 이어나갔다.
그런 놀라운 승전의 바탕에는 그의 뛰어난 용병술은 물론, 유인석 선생을 위시한 유림과 선비들과의 돈독한 교분과 광무황제의 도체찰사로의 신임, 무엇보다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가토록 하는 등의 자신과 가족의 안위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도 없지 않았다. 눈보라 치는 추운 날씨에 산중에서 적과 대치하던 그는 결국 과로로 병을 얻게 되고, 11월 풍기 북상동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부하 장령들을 보며 그는 몹시 슬퍼하며 통탄했다. 그가 의병으로 나선 지 십여 년 만에 처음 맞이한 지독한 패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강인한 용기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모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을 때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은 일제의 발악적인 저지와 혹독한 폭설, 식량과 탄약의 부족으로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에겐 천추의 한이나 다름없었다.
#3. 이 몸 죽은들 싸울 뜻까지 사라지랴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붓을 손에 들었다. 어느덧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굳센 결의의 빛이 흘렀다. 삼엄한 감방복도를 울리는 구둣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는 붓으로 한지에 몇 줄의 짧은 글귀를 일필휘지로 써나갔다. 곧 그의 감방 앞에서 구둣발소리가 멎었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 줄 짐작했다. 일전에 재판부로부터 이미 교수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다. 자물쇠 따는 소리와 함께 감방 문이 열리고, 제복차림의 간수가 그를 호명했다.
기다렸다는 듯 결연히 몸을 일으키던 그가 일순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누런 광목천으로 동여맨 왼쪽 복사뼈 부위가 퉁퉁 부어오른 채 괴사해가고 있었다. 지난 유월에 충북 청풍의 까치성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자리였다.
돌이키면 참으로 통한에 찬 전투였다. 당시 심한 장맛비로 인해 의병들의 화승총이 못 쓰게 되지 않았거나, 발목에 심각한 총상만 입지 않았어도 백전불굴의 의병장인 그가 일본군의 손에 사로잡히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감방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간수가 은연중 경외감을 드러내며 그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이상 다른 죄인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간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재판정에서 ‘국가의 세금을 축내는 것이 의병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을 받은 그는 가슴을 펴고 의연히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국가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나라의 공금을 사용한 것이 역적이냐, 아니면 원수인 적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적은 섬기면서 국가의 녹을 받는 것이 역적이냐?’라고 되묻고는,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 나라를 삼키려는 왜놈들을 섬멸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한 것이다!’라며 통렬히 재판장을 꾸짖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것 좀 전해주게.’
간수에 둘러싸인 채 형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가 품속에서 꺼낸 한지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의 처절한 심경을 여실히 드러낸 시였다.
五十年來判死心 到今寧有苟生心 盟師再出終難復 地下猶存昌劍心
오십 평생 살아오며 한 목숨 던진 바에 이제 와서 구차하게 삶을 구하랴만 적을 무찌를 일 돌이키기 어려워라. 이 몸 죽은들 싸울 뜻까지 사라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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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이강년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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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운강의 의병활동 연보를 비롯해 속오작대도, 문집,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
◆운강 이강년 기념관
운강의 치열했던 삶과 그의 항일투쟁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운강 이강년 기념관’이다.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다.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운강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2년 4월 개관했다.
기념관은 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에서는 의병활동 연보를 비롯해 훈장 및 포장, 재산 전투 디오라마, 운강 의병부대 활동상 등을 볼 수 있다. 또 의병의 전술이 기록된 ‘속오작대도’와 ‘운강선생문집’, ‘운강 선생 무과급제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조총, 의병창, 화약통, 활, 화살, 관복, 문서통 등도 관람할 수 있다. 영정은 사당에 봉안돼 있다. 입장은 무료,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 단축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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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섭 |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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