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9>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경주)

  • 입력 2013-07-15   |  발행일 2013-07-15 제11면   |  수정 2021-06-02 18:16
풍속 인형을 만드는 그 손끝, 우리의 역사로 일본의 독소를 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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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에 있는 윤경렬 선생의 옛집인 고청사. 199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어린이박물관학교 운영과 신라문화 연구에 힘썼다. 현재 전시공간과 체험장 등이 있는 기념관으로 조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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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사에 전시되어 있는 윤경렬 선생의 공예품. 선생은 우리 고유의 풍속인형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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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윤경렬 선생이 처음 시작한 어린이박물관학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다.



◆Story Briefing

“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다.”

향토사학자이자 풍속인형가였던 고청(古靑) 윤경렬(尹京烈, 1916~99) 선생이 남긴 말이다.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경주로 내려와 50여년을 살았다. 그 시간을 풍속인형 제작자로, 초중등학교 미술교사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강사로, 신라 문화를 지키고 알리는 데 앞장섰다.

경주로 내려온 그해부터 ‘고청인형’을 운영했고, 1954년에는 진홍섭 당시 경주박물관 관장과 함께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열어 교육을 시작했다. 어린이 박물관 교육으로는 국내 최초였다. 1956년에는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1999년 별세할 때까지 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 고청사에서 머물렀다. 선생이 손수 지은 고청사는 문화유산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현재 기념관 조성이 진행 중이다. ‘경주 남산 고적 순례’ ‘경주 남산’ ‘신라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1980년 동아일보 햇님상(어린이보호부문), 외솔상, 경주시문화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국민훈장 은장’이 추서됐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신라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마지막 신라인’이라고도 불린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는 평생 동안 경주와 신라문화를 사랑했던 고청 윤경렬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1. 아름다운 운명… 인형에 사로잡히다

온천으로 유명했던 함경북도 주을은 북방의 마을답게 5월이나 되어야 꽃이 피었다. 선생의 집은 양지쪽 산비탈에 위치한 과수원이어서 배꽃, 능금꽃, 살구꽃, 복사꽃, 오얏꽃이 한꺼번에 흐드러지곤 했다. 또한 북방의 고장답게 이른 겨울부터 눈이 찾아왔다. 김삿갓이 노래했듯이 송이송이 날아오는 눈송이는 삼월 봄나비 같았고, 밟을 때마다 나는 꾸드득 꾸드득 소리는 칠월 개구리 소리 같았다. 그런 곳이었다.

선생이 학교에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는 ‘학도가’ 등의 일본 창가였다. 임진왜란을 배우면서도 이순신 장군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고,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공부하면서도 당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알았다. 역사,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가 그런 식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전통을 불모지라 했고, 그나마 있는 것도 천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 그렇게 모진 시절,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바로 인형이었다.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토우 인형가게에서 처음 접하면서였다. 흙으로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들이었다. 인형을 구경하느라고 수업 첫 시간에 지각을 하거나, 가게 창에 매달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집에 늦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찰흙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내선 그 흙을 파다가 했는데, 구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말린 흙 위에 그냥 채색했다. 그래도 그 인형들을 학교에 가져가면 동무들이 좋아했다. 인형을 만들고 새기느라 방바닥이며 옷이 흙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어머니한테 야단도 들었다. 선생은 점점 더 인형에 몰두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인형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만든 풍속 인형은 조선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들이었다. 모멸스럽고 불쾌했으며 자존심이 상했다.

선생은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인형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면 더 아름답고 좋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인형에 대한 선생의 열망은 결국 그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1935년 일본 규슈 하카타의 나카노코 인형 연구소로 떠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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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윤경렬
 

#2. 열정의 여정… 균형과 조화를 향하다 

 

1938년, 3년 반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선생은 주을에 새로 세워지던 절에서 잠시 단청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3년 개성에 자리를 잡고부터 ‘고려인형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유섭(高裕燮) 선생을 만나면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고유섭 선생은 고고미술학의 선지자로 1944년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었다. 그가 윤경렬 선생에게 던진 화두는 이러했다.

“자네 일본에는 왜 갔는가? 자네 손끝에 일본 놈의 독소가 3년 배었다면 그 독소를 빼는 데는 10년 이상 걸릴 걸세.”

선생은 고통스러웠다. 일본에서의 그 긴 시간을 얼마나 어렵게 견뎌냈던가. 하지만 윤경렬 선생에게도 민족의식은 강했다. 주을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있었던 선생의 부모도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었고, 무엇보다도 고향에서 겪은 광주학생운동이 남긴 불덩이가 가슴에 뜨겁게 살아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전남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 항일운동을 말한다.)

선생은 결심했다.

“일본 놈의 독소를 빼기 위해서는 역사가 깊은 곳으로 삶의 터를 옮겨야겠다. 백제 유적이 부드럽고 따스하니 부여나 공주도 좋겠지만, 통일신라 유물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 우리 겨레의 지혜가 뭉쳐 이루어진 것이니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로 경주였다.

#3. 천년의 만남… 나는 마지막 신라인이라

1948년, 선생은 경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치 기갈이 든 사람처럼 계림으로, 첨성대로, 괘릉으로, 석굴암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신라의 향기에 한없이 취했다. 선생은 확신했다. 경주야말로 일본의 독소를 지우고 우리 풍토에 맞는 밝고 찬란한 예술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선생은 먼저 교육에 눈을 돌렸다. 경주 시민 모두가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려면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52년 경주박물관 관장이던 진홍섭 선생을 만나면서 그 뜻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절이라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모이고 쌓였다. 드디어 1954년 10월10일, 박물관에서의 첫 수업이 이루어졌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받지 않았으며, 수업 시에는 존댓말을 썼다.

그러는 동안 선생은 점점 더 깊어졌다. 훗날 신라문화가 백제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느냐는 시비에 대한 선생의 답이 인상 깊다.

“석굴암의 조각을 보면 남자처럼 엄격하면서도 여자처럼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운 건 백제적 요소이고, 엄격한 건 고구려적 요소입니다. 신라인들은 그런 요소들을 합쳐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했으니 삼국의 문화가 조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온조 왕조가 막을 내린 것일 뿐입니다. 권력이 바뀐다고 민족이 멸망하는 거라면 지구상에 남아있을 민족은 없습니다. 백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숨 쉬고 있는데 멸망했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또 하나, 선생이 무섭도록 집중한 것은 경주 남산이었다. 서라벌 남쪽에 있다 해서 이름이 붙은 남산은 신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쪽의 나정(蘿井)은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곳이었고, 근처 양산재(楊山齋)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촌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었다. 포석정은 신라 말기에 경애왕(신라 제55대 왕, 재위 924∼927)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신라의 종말을 상징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은 최고봉인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4골과 180봉을 안고 있는데 여기엔 고분, 왕릉, 절터, 불상, 탑 등 엄청난 유적이 있었다. 발길 스치고 눈길 머무는 산골짝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인 셈이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서라벌에 대한 일연 스님의 비유 부분이 있다.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

절들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날아간다.

어쩌면 위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붙여도 될 정도로 남산은 서라벌의 상징이었고, ‘산속의 노천박물관’이었다. 선생도 ‘남산을 보지 않고서는 신라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선생이 남산을 조사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600여 차례 산을 오르내렸고, 자료를 모아 정리했다. 그 성과로 ‘경주 남산 고적 순례’ 등 여러 책을 출판해 남산을 더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

#4. 운명의 땅… 양지마을에 남다

경주 남산의 북쪽 끝자락과 경주박물관 사이에 아담한 마을이 있다. 양지마을이다. 남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양지마을, 서쪽을 음지마을, 그렇게 부른다. 양지마을은 아침에 뜬 해가 온종일 마을을 비추다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나면, 그 남긴 마지막 열이 동네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남천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남천의 양쪽 강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경치가 아주 좋았다.

이 양지마을을 선생은 무척이나 사랑했다. 경주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새천년을 한 달여 남겨둔 1999년 11월30일, 선생은 마을을 떠났다. 하늘의 부름이었다. 고향이 이북인 탓에 하고자 하는 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더운밥이 단 줄도 모르고, 살얼음판 딛듯이 살아온 긴 시간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겨울을 택해 떠난 것이었다.

시인 서영수는 선생을 이렇게 노래했다.

곱슬머리 타래진 얼굴 저편에/ 천년 신라가 누워 앓고 있는데/ 흰 두루막 고무신을 솔가지에 걸어놓고/ 삼화령 높은 봉에 꿈을 캐는 그림자여

꿈을 캐는 그림자…. 그랬다. 그림자란 홀로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이나 사물에 따라붙는 것이 그림자다. 그렇다고 그림자의 가치가 떨어질까? 아니다. 그림자가 있음으로 해서 사람이나 사물은 자신이 가진 생명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신라의 그림자였다. 선생으로 인해 신라문화는 더 빛날 수 있었다. 또한 선생은 남산을 지키는 산신령으로, 신라를 지키는 마지막 신라인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는 떠났어도 떠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인생이란 완전한 발판 위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불완전한 발판을 쌓으면서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끔 오랫동안 남의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온 손끝이 아닌가 싶어 솔직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솔직해지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솔직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는 어릴 때 제일 처음으로 흙으로 만들었던 것을 다시 만들어본다. 불완전한 발판들이 쌓이고 쌓여서 몇 대가 흐르면 그래도 뭔가 꽃이 피지 않을까 간절히 기대해보면서……’-자서전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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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참고문헌=마지막 신라인 윤경렬(학고재)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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