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2>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김천)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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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8-05   |  발행일 2013-08-05 제13면   |  수정 2021-06-02 18:41
“대한독립만세” 그의 목소리를 따라 사람들은 유동산으로

얄궂은 그의 운명…‘일본 간첩’ 누명쓰고 소련서 처형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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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김단야가 고향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나섰을 당시, 행진해 갔던 김천 개령면의 유동산. 김단야는 이때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단야는 본격적으로 독립투사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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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가 태어난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마을 전경.

 

◆ Story Briefing

김천 출신의 김단야(金丹冶 1900~38)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상하이 트로이카’로 불린다. 대구 계성학교 재학시절,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는 미국인 교장에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하기도 했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배재학교 시절부터다. 당시 학생비밀결사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고향 김천으로 내려온다. 낙향 후 만세운동을 주동하면서 독립투사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1938년 처형된 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랫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2편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에 대한 이야기다.


 

#1. 고향 김천에서 만세운동 주도

재판정에서 처형장까지는 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점점 짙어져 갔다. 길은 스무 걸음쯤 앞에서 구부러져 있었는데, 막다른 길임이 분명했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는 게 억울하고 분하다.’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회한은 내려놓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어른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아들 비탈리아, 아내 주세죽, 아버지,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조국과 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숨져간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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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의 아버지가 세운 개령교회. 그의 아버지 김종원은 초기 개신교 신자인 선친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남달랐다. 김단야가 기독교 계열인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한 것도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
김태연(金泰淵)은 1900년 1월16일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김단야(金丹冶)’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유년기에 한학공부를 잠깐 거친 뒤 줄곧 기독교계열의 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조선이 일본에 자주권을 빼앗긴 시기에 학원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산파 역할을 했다. 그래서일까. 대구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11월 단야는 일본의 조선 지배가 정당하다고 떠들어대던 미국인 교장에게 항의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1919년은 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해였다.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뒤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동맹휴학과 당국의 학원폐쇄로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이 많았다. 천안의 유관순(柳寬順)처럼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배재학교에 다니고 있던 단야도 고향 김천에 내려와 있었다.

3월24일, 김천 개령면 동부리에는 여느 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개령공립보통학교 졸업식과 은씨 가문의 혼인 잔치가 있었다. 이 일 저 일로 겸사겸사 어울리니 꼭 장날 같았다. 오랜만에 마주친 얼굴끼리 안부가 오가고 잔치음식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 뒷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대한독립만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산봉우리에 서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두 팔을 번쩍번쩍 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그때 한 청년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바로 단야였다.

“여러분, 지금 온 나라와 나라 밖 동포들이 일제에 맞서 독립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교사와 공장인부, 어린 학생, 심지어 기생들까지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헌병대의 총칼에 쓰러지고 피 흘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란 듯이 외면하시렵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단야의 기백에 눌려 모두 아무 대꾸를 못했다.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온 사람도 있었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사람들이 다치고 잡혀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소. 잔치는 여기서 멈추고 우리 뛰어나가 외칩시다. 대한독립만세!”

한 사람이 감격에 차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얼떨떨해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너나없이 나라 잃은 울분이 가슴에 한 짐 쌓여 있었던 터라 이렇게 목청껏 소리치니 속이 시원했다. 단야는 사람들을 이끌고 동료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는 유동산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집 밖에 나왔던 사람들까지 하나둘 따라왔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던 대열은 곧 헌병대를 만나 흩어졌고, 단야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하지만 개령면에서는 이 사건에 자극받은 만세운동이 연이어 벌어졌다.

단야는 곤장 90대를 맞고 풀려났다. 그해 여름에는 적성단(赤星團)이라는 비밀결사조직에 들어갔다.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으며, 독립군에 지원할 의용군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아서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상하이로 망명을 택했다. 도망자의 삶이 어떤 운명으로 귀결될는지 스무 살 청년은 그때 예감했을까.


#2. 상하이로 망명…제2의 만세운동 계획

3·1만세운동 이후 망명했던 수많은 지사들은 중국과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접했다. 단야 역시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고,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한 뜻으로 지사들과 의지를 불태웠다.

1922년 봄, 단야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과 함께였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체포되었고,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보냈다. 세 사람의 귀국 목적은 서울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악랄한 고문에도 그 목적만은 숨겼고, 출옥한 다음 비밀리에 조직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25년 조직이 발각되어 위협을 느낀 단야는 다시 상하이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26년 4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6월10일로 정해졌다. 국내외 동포들의 대대적인 애도열기를 보며 단야는 3·1만세운동을 떠올렸다. 그때도 고종(高宗)의 장례를 앞두고 몰린 군중이 운동의 핵심동력이었다. 고향 김천에서 자신이 벌였던 만세운동의 기억까지 돌이켜보았다. 단야는 순종의 장례가 온 민족의 열망을 다시 한데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믿었다.

그러나 머리가 아팠다. 역량을 집중하려면 민족의 단합이 필요한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사이가 나빴다. 뭐든 맞들면 낫다는 것을 어느 쪽인들 모를까. 하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단야의 동료들조차 단야의 생각에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단야는 계속 설득했다.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의 유일무이한 과제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단야는 자신이 국내에 심은 조직을 좌우합작을 위한 창구로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그런 한편 민족주의 진영과 접촉하며 교감을 넓혀 나갔다.

한달여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거사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났다. 당일 배포하려고 숨겨뒀던 격문이 우연히 일본경찰의 눈에 띄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국내 사회주의 조직은 다시 한번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야의 계획과 기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6·10만세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3·1운동 이후 숨죽여 있던 민족의 공통된 열망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념을 넘어선 해방운동을 펼쳐보자는 단야의 꿈은, 이듬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를 만든 밑거름으로 평가된다.

그후 단야는 상하이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국제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중개하는 거점역할을 주로 맡았다. 1934년부터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과장을 역임했다. 1937년이 되자 드디어 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단야도 조국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해방되지 않은 조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모스크바의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스탈린은 불안을 피바람으로 다스리는 위인이었다.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늘 꺼림칙했던 그는 조선인을 일본에 부역하는 민족쯤으로 치부했다. 그는 조선반도에 가까운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중이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두고 있었다. 이른바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였다.

1937년 11월 단야는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에게 체포됐다. ‘일본제국의 간첩이며, 반혁명폭동과 테러활동단체를 결성한 1급 범죄자.’ 이것이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이 내린 판결이었다. 단야는 즉시 처형당했다.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들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이념을 넘어 조국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외길을 걸어간 이들로 평가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단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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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

글=조정일<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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