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바보성자’ 김수환의 유년시절 추억과 성직자의 길(군위)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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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8-26   |  발행일 2013-08-26 제13면   |  수정 2021-06-03 14:58
소년의 초가삼간은 일년에 두번 도배를 했다, 그리고 신부님을 모셨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바보성자’김수환 추기경의 유년시절 추억과 성직자의 길(군위)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초가 내부. 1993년 3월, 59년 만에 이곳을 찾아 추억에 잠긴 김 추기경의 생전 모습 사진이 걸려있다.

 

◆ Story Briefing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편은 군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1922~2009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 추기경은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구미 선산에 살다가 다섯 살 무렵 군위로 이사 와 군위보통학교(현 군위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대구가톨릭대학교 전신인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1993년 3월, 군위를 떠난 지 59년 만에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위에서 살던 당시, 추기경의 어머니는 포목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지만, 신앙심만은 남달랐다고 한다. 장사꾼이 되고 싶었던 김 추기경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던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군위는 김 추기경이 신앙과 꿈을 키운 정신적 고향이자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1. 소년 김수환의 군위 추억

서편 하늘의 노을이 장엄하면서도 곱다. 기도를 할 때의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표정과 닮아 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한 초가삼간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던 소년 김수환(세례명 스테파노)은 눈을 돌려 멀리 야산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고갯길을 본다. 가난하지만 옹기종기 정겹게 모여 앉은 마을 초가지붕들 위로 홍시빛깔 노을이 내리고 있다. 머지않아 대지에는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하지만 아침 일찍 포목 보따리를 이고 장마당으로 떠나간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마음에 문득 고적감이 조수처럼 밀려든다. 이럴 때 동한(카를로) 형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객지로 돈 벌러 떠나간 나이든 형들이나 누이들은 그다지 그립지 않았다. 그러나 세 살 터울인 동한 형만큼은 몹시 보고 싶었다. 소년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던 형이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바보성자’김수환 추기경의 유년시절 추억과 성직자의 길(군위)
김수환 추기경이 다섯살 무렵 이사와 유년시절을 보낸 초가. 추기경의 형 동한이 대구 소신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이 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소박해 보이는 초가삼간이, 평생 남을 위해 헌신한 김 추기경의 모습을 닮은 듯하다.
 

동한 형은 재작년에 대구의 소(小)신학교(성 유스티노신학교)로 떠나고 없다. 아마 방학 때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대구는 어머니가 옹기장수를 하던 아버지(김영석, 요셉)와 만나 결혼해서 정착한 곳이자 소년의 출생지였다. 남산동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보다 선산에 살다가 다섯 살 무렵 이곳 군위로 이사한 기억이 더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마음껏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던 군위 용대리는 소년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언제까지나 이 정든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는 내년이면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이곳 용대리를 떠나 대구의 소신학교로 가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몇 년 전인가 어머니가 형 동한과 소년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할 정도로 지극한 신앙심을 가진 분이었다. 포목행상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저녁에도 피곤함을 무릅쓰며 몇 시간씩 기도를 했다. 그런 후 소년에게 종종 옛날 성서나 순교자, 성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소년의 할아버지(김보현, 요한 공) 얘기도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병인박해(1866∼1868년) 때 충남 연산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아사(餓死)하셨다고 했다. 할머니(강말손)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되었고, 그때 풀려나서 낳은 아이가 소년의 아버지 김영석이었다.

천주교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평생 옹기장수를 하며 가난하고 힘겹게 살았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신앙심만 믿고 시집와서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항상 굳은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교육열을 잊지 않았다. 그건 대대로 이어져온 순교자 집안의 순정(純正)한 내력이기도 했다.

군위로 이사한 다음에도 어머니는 옹색한 초가삼간을 마다않고 공소(公所)를 열었다. 그래서 소년의 집은 봄가을 두 차례 방문하는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는 집이기도 했다. 집에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신도들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하며 공경을 표했다. 그럴 때의 신부님은 하느님처럼 높고 존귀하게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말을 좇아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세상을 떠도는 장사꾼이 되고 싶었고, 돈을 벌어 오순도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게 소년의 동경이자 꿈이었다.


#2. 청년 김수환, 그리고 성직자의 길

학도병으로 일제에 강제징집 당했던 청년 김수환은 광복이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랑하는 형 동환은 부산 범일성당의 보좌신부가 되어 있었다. 후일에 지병인 당뇨를 앓으면서도 결핵환자들을 위해 대구결핵요양원을 인수하여 사회복지에 열심히 힘을 쏟다가 세상을 뜬 형은 당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얼마 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났고, 어렵게 신학교 졸업을 앞뒀을 때 청년 수환은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청년은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겸허하고 부족한 마음을 담아 시편 51장의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

사제 서품식이 있던 날은 1951년 9월15일로 음력 팔월 보름이었다. 열세 살 나이에 어머니의 명을 좇아 대구의 소신학교에 들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그날따라 유서 깊은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았다. 대구교구 신부님과 교우들이 서품식장을 가득 메웠다. 그날 서품식에 참석하여 자식이 신부가 된 것을 본 어머니는 기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건 막내아들이 대견해서겠지만, 눈물로 지낸 인고의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제가 된 수환은 곧장 대구대교구 안동본당(지금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는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궁리 끝에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부산의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을 찾아갔다. 그렇게 얻은 적지 않은 돈으로 궁핍한 신자들을 위해 얼마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후일에 돌이키면 신념대로 행하고, 열과 성을 다했던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본당 사목을 하던 그는 교구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대구에 내려온 그는 대구대목구장이었던 최덕홍 주교(1902∼54년)의 일을 도왔다. 그에겐 아버지처럼 엄격하면서 자상한 분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 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온전히 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랑에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임을 일깨워준 분이었다.

어머니를 여읜 다음해에 그는 해성병원 원장직과 김천본당(지금의 황금동 본당)을 맡았다. 아울러 유치원과 성의중·고교 교장을 지냈다. 학생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지냈던 시기였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간 그는 뮌스터대학 요셉 희프너 교수 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공부였다. 후날 종교의 사회참여와 헌신에 대한 의식이 이때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1963년)한 그는 대구에서 가톨릭시보사(지금의 대구대교구 가톨릭신문사) 사장직을 맡아 사원들과 함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한국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지를 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도소를 수시로 드나들며 재소자들을 만나 교화하며 예수님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행려병자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립복지시설 ‘희망원’을 자주 방문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에 애정을 쏟았다.

마산 교구장이 된 것은 사제서품을 받은 지 15년이 된 해였다. 당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et Pro Mulitis)’로 정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소명의식의 발로였다. 그 뒤 그는 1968년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을 맡게 되었다.

다음해인 1969년에 마침내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나이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이었으며,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성직자로서 평생을 누구보다 겸허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 고통받는 사람과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낮은 자세로 그들 편에 서서 사랑을 행하는 일에 앞장섰다. 노동자들이 있는 산업현장과 평화시장, 산동네와 난지도 쓰레기장, 사북탄광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면 그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바보 성자’라고 불렀다. 노자가 말한,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大智若愚)라는 말처럼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리석고 바보처럼 보이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펼치려 애썼던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목자의 삶이었다.

이처럼 사랑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며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향년 87세를 일기로 선종에 들었다.

추기경이 살았던 군위 생가는 군위읍에서 가까운 용대리에 있으며, 생가와 1㎞쯤 떨어진 곳에는 천주교 공원묘지도 있다. 군위군은 이 지역에 새롭게 ‘사랑과 나눔’ 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소규모 성당인 ‘경당’과 김 추기경의 부모가 옹기를 구웠다는 옹기굴을 복원하는 한편 추모체험관 및 수련원을 계획 중에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바보성자’김수환 추기경의 유년시절 추억과 성직자의 길(군위)
박희섭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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