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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화백이 태어난 울진 말루마을 생가 전경. 일찍 고향을 떠났지만, 유 화백의 고향사랑은 각별했다. 6·25전쟁 때는 고향으로 내려와 한동안 살기도 했다. 2002년 세상을 떠나기 몇해 전에도 고향을 찾아 동네 전경과 자신이 태어난 생가를 사진에 담아 올라갔다고 한다. |
◆ Story Briefing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劉永國·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모더니즘 1세대 작가에 속한다. 1935년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 중퇴 후 일본에 건너가 추상미술에 심취한다. 일본 추상미술 운동을 주도했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고, 1938년 이 전시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7년 한국 최초 추상미술그룹인 신사실파를 창립했고, 1957년에는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는 등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산, 길, 나무 등의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추상화풍을 평생 동안 견지했다. 특히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많다. 고향 울진의 산은 두고두고 그의 작업을 떠받치는 힘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산의 화가’로 불린다. 생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작품 속에 산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내가 살던 고향(울진)의 이미지가 잠재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의 생가는 현재 울진읍 읍남리 말루마을에 남아있다. ‘유부잣집’이라고도 불린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1편은 한국 추상미술의 새 길을 연 유영국 화백에 대한 이야기다.
#1. 한국 추상회화의 개척자
전쟁은 고향의 품을 더욱 절실하게 그리게 하는 듯하다. 유영국은 1·4 후퇴 때 쫓기듯이 남으로 내려와 울진의 고향집에 다다랐다. 말루(抹樓)라는 작은 마을. 남대천 건너편으로 비래봉이 우뚝하니 선 게 눈에 들어온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도 바로 내다보인다.
마을 이름이 말루인 것은 유래가 있다. 1600년경 마을 앞 냇가에서 발견된 나무투막에 지로(旨老)라는 기록이 있어서 ‘지로동’이라 부르다가, 1750년 울진현의 객관 동편에 목재로 지은 누정이 있어서 ‘말루’라 부르게 되었단다. 그의 집 주소는 울진읍 읍남2리 216번지(말루길 118-21).
말루에는 뒷섬골과 개골동이 있는데, 뒷섬골은 예전부터 토지가 기름지기로 유명했다. 당연히 이 마을에는 큰 부자가 있었다. 유부잣집. 130여년 전에 태어나 나이 서른에 만석꾼이 된 유재업이 일구어낸 부였다. 그의 아들 유문종이 그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유영국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
유영국은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틈만 나면 주변의 산을 뒤지고 다녔다. 이따금 바다로 나가 동해의 장쾌한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 하염없이 상념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 불현듯 지난 세월이 되돌아보였다.
그는 1916년 봄에 태어났다.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그는 경성 제2고보를 4년 동안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일본식 규율에 얽매인 교육방식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곧장 일본으로 갔다. 학업은 계속해야 하는데 뭘 할까를 고민했다. 문학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결국 미술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그림이 좋지 않을까?”
그는 동경문화학원 서양화과를 선택했다. 이 학교는 진보적인 미술교육으로 유명했다. 형식을 싫어하고 자유롭게 지내려는 기질의 그에게 딱 맞는 학교였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이 그의 생을 결정지어버렸다. 그의 기질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전위미술의 선구적인 입지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학원에는 한국인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박일주, 이철이 이미 공부하고 있었고 유영국, 김병기가 같은 학년이었다. 이어서 문학수, 이중섭, 안기풍 등이 입학했다. 이들은 입학과 더불어 전위적 예술의 총아라는 의식에 불탔다. 그리하여 유영국의 구성주의적 경향과 문학수의 초현실주의적 세계, 이중섭의 야수파적 면모들이 이내 드러났다. 일본화단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유영국은 관전보다는 재야 미술단체전에 출품했다. 자유전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1930년대 일본 화단은 문부성이 주관하는 문전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이 전시의 보수성과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화가들은 이과전과 독립전, 그리고 자유전을 창설하여 새로운 예술의 문을 열었다. 그중 자유전은 추상미술이 주를 이루는 전위미술의 집합소였다. 그런 만큼 유영국은 미술의 입문 때부터 일본에서 가장 전위적인 그룹에 속했던 것이다.
1940년의 그의 작품들은 간결한 직선을 구성주의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나무 판자를 사용하여 기학적인 부조를 해 일본 화단의 관심을 모았다. 그가 판자를 사용한 일화가 전한다.
작품 재료를 구하려고 건축자재 상점을 기웃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자재들이 비쌌다. 유학생 신분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그로서는 대개 그림의 떡이었다. 늘 보기만 하고는 돌아갔다. 한 상점 주인이 그러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 학생이 누구지?”
“조선 유학생이랍니다. 유영국이라는 화가지요.”
“그래. 내가 도와주어야겠군.”
그는 유영국에게 건축자재 부스러기들을 선뜻 내주었다. 유영국은 그 판자들을 이용하여 부조형식의 구성작업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화가가 없었다. 그의 자유로운 기질이 캔버스에 유화 안료로 그리는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판을 이용한 입체적인 콜라주 작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의 자유전 참가는 1937년 1회전부터 1942년 4회전까지 계속됐다. 2회전에서는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1940년 자유미술전의 지방 순회전이 기획되어 서울에서 전시가 개최되어 유영국과 김환기, 이규상, 이중섭, 안기풍 등 추상미술이 선보여 한국 미술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로서는 추상미술은 국내에서는 미답(未踏)의 세계였다.
그는 1943년 귀국한다. 9년3개월을 일본에서 보낸 셈이다. 이후 그는 한동안 활동을 멈춘다. 일제 강점기말의 전시체제 문화행정을 피해 잠적한 것이다. 광복이 되자 그는 이내 상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의 의욕을 보여, 1947년 신사실파 창립에 가담한다.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세 사람이 신사실파 멤버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 그룹으로 꼽힌다. 그러나 추상미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미술의 전개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터져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산이 많은 울진지역의 자연을 새삼 눈여겨보았다. 그것들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그래, 산이야말로 내 고향의 숭고한 본 모습이 아닐까?”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이 때 몸담은 고향의 산은 이후 두고두고 그의 작업을 떠받치는 힘이 되었다.
#2. “산은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
그가 산이라는 소재를 화폭에 끌어들인 것은 광복 이후 추상미술에 대한 몰이해를 해소하기 위한 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완전추상에서 반추상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는 추상에 대한 한국 화단의 이해를 위한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이후 그의 화면에는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의 형상이 구성적인 굴절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종래의 추상작업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비구상적 추상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를 통해 “나의 작품 속에 산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내가 살던 고향의 이미지가 잠재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산은 광복 이후에 와서야 그의 화폭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전쟁의 한 시기의 고향생활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그는 방학 때가 되면 자주 가까운 해변에 나가 종일 바닷가에 앉아서 먼 산을 보거나 수영하는 걸 좋아했다. 이런 자연취향이 차츰 그의 화풍을 서정적으로 구축하는 양식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 명확하고도 간명한 구성주의적 추상에서 자연에 대한 서정적인 정감을 자아내는 비구상적 경향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자연에의 관심에 있었음이 자주 얘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산 작업을 두고 우리의 전통적인 문인산수화의 새로운 해석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40대 이후 그의 화폭을 지배했던 산은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났다.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구성으로 자연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는 다양하고도 풍성한 세계를 구축했다. 산은 그림마다 제각기 다른 구도와 색감으로 드러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구축된다. 단순한 색채의 처리지만, 그 색채로 드러나는 형태는 역시 단순하면서도 간명함이 강조되여 오히려 더욱 심오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하여 미니멀 회화나 모노크롬 회화의 극단적인 추상의 메마름에 매달리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정서를 포착해냄으로써 극단보다는 동양적 중용의 미학을 드러낸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색채를 배합하는 것도 통합과 소통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강한 색과 약한 색의 대비를 통해 깊이 있고도 유현한 공간감을 자아내며, 짙은 색으로 중첩적으로 표현한 산들은 그 뒷면이나 윗면에 밝은 공간을 드러냄으로서 어떤 고양된 정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자주 산을 찾았다. 특히 강원도의 산들을 좋아했다. 남설악의 겨울 산 풍경을 보기 위해 훌쩍 떠나는 날도 잦았다.
#3. 타고난 자유주의자
유영국은 타고난 자유주의자였다. 광복 직후 그는 서울대 미술과 응용미술부에서 교직을 맡았으나, 당시의 교육 분위기가 마음에 차지 않아 2년3개월 근무로 끝을 냈다. 그 후 1960년 홍익대에 3년 동안 근무하기도 했지만, 역시 사표를 내고 자유인으로 돌아가 버렸다. 틀에 매인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생활이 작품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이후 그는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 자신만의 양식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일에 몰두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모던아트협회 결성에 참여, 새롭게 작업의 열정을 다졌다. 이 협회에는 그를 비롯하여 황염수, 이규상, 정점식, 정규, 박고석, 한묵 등이 멤버로 참여한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1958년에서 1962년까지 참여했다. 이 전시는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전개에 호응한 것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큰 역할을 했다. 1962년에는 신상회를 조직, 새로운 모색을 도모한다. 그러나 그는 1964년을 끝으로 모임을 떠나 새롭게 개인적인 작업에만 몰두하게 된다.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최 ‘유영국 초대전’은 그에 대한 평가를 결정짓는 전시가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지런하게 화폭을 열정적으로 경영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넘어서 한국 추상미술의 한 결정적인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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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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