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자녀교육으로 한 번 가르쳐 볼 만한 ‘양반들의 식사법’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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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25   |  발행일 2013-10-25 제41면   |  수정 2013-10-25
양반들이 밥그릇 오른쪽에 남긴 ‘초승밥’의 의미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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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간고등어 등 이 곁들어진 예 미정 한상차림. 안동 종가의 내 림맛을 현대적 으로 절충했는 데 그 시절 동치 미와 놋종지에 담긴 지렁 등이 보이지 않아 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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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종가음식산업화사업단이 내림 안동 종가음식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내놓은 예미정 비빔밥 한상 차림.



돌아가신 조부는 수저를 들기 전 반드시 헛기침을 몇번 했다. 훗날 그 헛기침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됐다. 한학자였던 조부의 밥상은 차려질 때나 식사가 끝났을 때나 그 정갈함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밥그릇 안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항상 밥을 남겼고, 대다수 내 차지였다. 그 밥에는 된장 국물, 고춧가루 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부는 밥 한번 떠먹고 국 한번 떠먹었다. 평생 ‘국 따로 밥 따로’의 원칙을 고수했다.

조선 양반(사대부)만의 ‘양반 식사법’이 1960년대까지 엄존했다.

행세깨나 하는 반가 어른들의 평생 숙업은 오직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였다.

행신범절에 대한 치밀한 매뉴얼북까지 개발된다. 그 주 저서가 주자가 집필한 ‘주자가례(朱子家禮)’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와 현실에 맞게 고쳐졌는데, 바로 1599년(선조 32) 사계 김장생이 펴낸 ‘가례집람(家禮輯覽)’이다. 권10에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등 제례음식 진설법이 잘 정리돼 있다.

반가의 밥상은 궁중 수라상과 소통됐다. 수라상은 임금의 밥상이기 때문에 식기 놓는 자리까지 정해진다. 나주에서 올라온 나주반에 차린 12첩 반상, 수라상도 원반, 곁반, 책상반 등 3개가 들어왔다. 반드시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받고 동편에는 왕, 서편에 왕비가 좌정한다. 겸상은 없다. 시중드는 수라 상궁도 3명씩 대령한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임금이 먹을 수 있는 국의 종류만 64가지였다.

궁중식은 ‘봉송(封送) 문화’ 덕분에 양반가와 맞물려 돌아간다. 임금이 음식을 다 들고 ‘퇴선(退膳)’하면 여러 신하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서울의 반가음식이 궁중음식과 닮은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하지만 궁중음식은 일반 음식과 격이 다르다. 양반이라도 차릴 수 있는 상을 9첩 이하로 제한하고, 12첩 반상은 궁중에서만 가능했다. 하지만 절대로 푸짐하지 않다. 요즘 2만원짜리 한정식 한상차림보다 덜 풍성했다.

 ◇감사와 여유
 밥 먼저 떠먹으면 ‘흉’
 감사 뜻으로 헛기침 세번
 지렁·동치미국물 순
 맛보고 본격 식사 돌입

 ◇가난과 배려
 아랫사람 먹게 하려고
 밥 다 먹는 법 없어…
 끼니때가 되면 절대
 남의 집 방문도 않아

 ◇예의와 존중
 어른 수저 들기 전에는
 아랫사람 식사 못 해
 어른이 다 들 때까지
 밥상서 기다려야

◆ 야윌 대로 야윈 양반밥상

‘양반은 대추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요기한다’고 했다. 수하를 위해 조금이라도 밥을 남겨 ‘밥상물림’을 한다. 양반가 식문화에 있어 가장 독특한 점이 바로 밥상물림인데, 그걸 존수하다 보면 몸이 많이 축나게 된다. 이걸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 해서 양반문화의 한 상징으로 여겼다.

안동과 영주, 영양 등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걸 ‘체면한다’고 했다. 자연 종부는 주발에 넉넉하게 남을 정도의 고봉밥을 퍼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중도 있다. 도산면 퇴계 종가에서는 먹을 만큼만 밥을 담는다. 워낙 접빈객이 많아서 살림도 축나고 해서 밥을 적게 담은 것이다.

◆ 7시 방향에서 1시 방향으로 숟가락질

밥상 법도도 아주 엄하다.

‘상전무언(床前無言)’. 양반은 밥을 먹을 때 절대 소리내면 안 된다. 또한 식사할 때 처음부터 밥을 떠먹어도 흉이 된다. 처음에는 ‘삼고례(三告禮)’부터 봉행한다. 천지인에 대한 감사함을 피력하기 위해 세번 헛기침한다. 어떤 경우에는 젓가락으로 밥상을 세번 두드리기도 한다. ‘그다음에 뭘 먹을까.’

반드시 종지에 담긴 지렁(조선간장)부터 떠먹은 뒤 본식을 개시했다. 그것도 전채라면 전채다. 3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은 달면서도 짜고, 짜면서도 달다. 완전하게 간수가 빠진 간장에 빻은 깨를 띄워 놓는다. 지렁이 미뢰(Taste bud)에 올라가면 침샘이 활성화된다. 프랑스 요리 전채는 바게트. 밀가루에 섞인 단백질 성분인 글루텐이 역시 침샘을 확장시킨다. 목 안이 건조할 때 식빵을 씹으면 물을 먹을 때보다 침이 더 많이 나온다.

지렁 다음에는 동치미 국물을 먹는다. 동치미는 한식 메뉴 가운데 가장 정갈하고 심플한 맛을 자랑한다. 좋은 물과 소금, 그리고 어른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동치미 무만 갖고 만든다.

양반에겐 밥 떠먹는 방향도 정해져 있다. 자전축 방향을 따라간다. 자전축은 지구 중심에서 23.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숟가락질은 보통 7시 방향에서 1시 방향으로 이동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퍼 내려가고 삽시각(揷匙角)은 45도. 반드시 오른쪽 모서리에 밥을 조금 남긴다. 그건 아랫사람을 위한 하나의 ‘정(情)’. 남은 밥은 늘 깨끗하다. 요즘처럼 국에 된장과 나물을 넣고 비벼 먹는다거나 밥에 국을 만 국밥은 ‘짐승이나 먹는다’면서 거부했다.

밥그릇 모서리에 남은 밥은 모양이 꼭 초승달 같다. 그래서 ‘초승밥’이라고 했다. 초승밥은 저승사자를 위한 ‘사자밥’, 날짐승 등을 위한 ‘까치밥’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배려심 깊은 3대밥에 속한다.

◆ 규합총서의 사대부 식사예법

규합총서에 사대부가 지켜야 할 다섯가지 식사예법이 적시돼 있다. 일단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면 그때서야 수하의 사람도 먹을 수 있었다. 어른이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했으면 아랫사람은 수저를 놓고 기다려야 했다.

양반들은 절대 점심때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예의였다. 붙잡는다고 해서 바로 식사에 응해서도 안 된다. 양반은 절대 겸상하지 않고 독상을 받는다. leekh@yeongnam.com


■ 경상도 반가음식 엿보기

퇴계 이황의 불천제위 음식 보니 ‘炙(적)은 군자혈식’이라 하여 모두 날것 사용


경상도 반가음식의 본체는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절대다수가 전통주에 대한 대목이었으며, 그 밖에 각종 장과 면요리, 김치류에 대한 언급이 많다.

반가음식의 본령은 일상식이 아니라 제사음식이었다. 특히 제사 중에서도 차사(茶祀)보다 기제사(忌祭祀)가 중시됐다. 기제사보다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더 중시했다. 불천위란 나라나 지역 향교에서 망자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봉행하는 것으로, 나라에서 정한 것을 ‘국불천위’라고 한다.

안동 종가의 국불천위 제사음식 전문 연구가는 전 안동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윤숙경씨. 윤씨가 관련 논문을 많이 남겼다.

퇴계 이황의 불천제위 음식을 엿보자. 특히 적(炙)은 ‘군자혈식(君子血食)’이라 해서 모두 날것으로 올린다. 탕도 기제사에는 통상 3가지만 올려도 되지만 여기선 5가지, 즉 쇠고기, 명태, 전복, 조개, 상어다. 적으로는 닭고기, 쇠고기, 쇠머리, 소 껍질 수육, 문어, 청어, 홍어, 상어, 방어 등이 들어가지만 안동의 명물 안동 간고등어는 올리지 않았다.

탕과 적에는 ‘우모린(羽毛鱗)’이란 룰이 적용된다. 깃이 달린 닭, 털이 있는 고기, 비늘이 있는 생선을 포함시켜야 된다. 적을 괼 때 생선류는 밑에, 고기류는 그다음, 맨 위에는 닭을 괸다. 채는 고사리, 시금치, 토란, 도라지, 무, 박나물 등 제철채소면 되고 전부 한그릇에 담아야 한다.

퇴계는 유언으로 ‘만들기 번거로운 유과와 약과 같은 사치스러운 음식은 올리지 말라’고 했다. 김치는 백김치, 건포는 대구포, 예전에는 청주를 담갔는데 이젠 정종으로 대신한다.

된장양념도 정말 중요하다. 구한말만 해도 요즘같이 개량된장이 섞인 쌈장 같은 게 없었다. 그때는 멥쌀과 엿기름, 고춧가루, 다시마, 무, 말린 가지와 말린 고춧잎 등을 넣고 숙성시킨 ‘집장’이 반가의 최고 양념장이었다. 일명 ‘거름장’이라고도 했는데, 삭힐 때 퇴비의 열에 삭힌다 해서 ‘거름장’으로 불렸다. 입맛 없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식사를 해도 좋을 정도로 영양도 풍부했다. 현대는 퇴비가 귀해 끓는 물속에 용기를 넣고 중탕해 삭힌다. 이 집장이 대구로 와선 ‘시금장’ 혹은 ‘등겨장’이 된다.

최근 안동종가음식산업화사업단이 안동 종가에서 전승되는 반가음식을 현대적 취향에 맞게 조율한 ‘예미정(禮味亭)’ 한창차림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안동 종부한테 그렇게 어필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종부의 손맛과 안목이 상업적이기 이를 데 없는 현대적 손맛과 퓨전적으로 쉬 섞일 수 있다는 마케팅 감각은 더욱 신중하게 살펴 봐야 될 것이다. 더 전통적인 게 더욱 현실적일 수도 있다. 예미정 밥상 한편에 예전 방식의 동치미와 놋종지에 담긴 지렁도 곁들였으면 한결 좋겠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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