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1> 포항 송라면 지경리 ‘염전과 어사터’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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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20   |  발행일 2014-05-20 제13면   |  수정 2021-06-15 16:00
조부가 정변에 연루돼 하루아침에 염전 관노비로 전락한 신유

땔감 마련하다 탈출, 어사가 되어 다시 이곳을 찾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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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3리에 위치한 어사터 전경. 지금은 논으로 바뀌었지만, 관노비 출신으로 어사가 된 신유를 기리는 기왓집이 있었다고 한다.

 

포항은 산업도시를 넘어 문화가 숨 쉬는 환동해권 중심도시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 

포항운하와 영일대해수욕장 등 지역의 명소는 연일 관광객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다. 

특히 영일만 주변에 산재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는 ‘문화도시’ 포항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콘텐츠로 손색이 없다. 

영일만 곳곳에는 옛 선인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어 ‘스토리의 보물창고’라 할 만하다. 

칠포리의 선사시대 암각화에서부터, 최근 도심재생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포항운하에 이르기까지 민초들의 삶에 얽힌 흡인력 있는 스토리가 풍부하다. 

영남일보는 지난해에 이어 영일만 일대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올해는 영일만 북부권의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재조명한다. 

시리즈는 격주로 연재하고 원고는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인 소설가 박희섭씨가 맡는다. 

첫회는 과거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리의 스토리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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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화진해수욕장에 위치한 옛 염전터의 모습.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2리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진 한 가운데의 백사장에는 염전이, 백사장 왼편의 건물자리에는 소금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정변에 연루된 양반가의 후손 신유는 동해안 염전의 인부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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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2리의 전경. 염전이 있었다고 해 염전동으로 불리고 있다.


포항의 북쪽, 동대산과 내연산을 굽이돌아 동해로 흘러드는 물빛 푸른 하천이 있었다. 시내 양편으로 능수버들이 많이 우거졌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은 버드내(지경천·地境川)라고 불렀다. 버드내 남쪽으로는 수십여 호 남짓한 초가들이 송이버섯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청하현과 영해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땅이라고 해서 ‘지경’으로 불리던 촌락으로, 남서쪽 속칭 ‘칼산(다라산·多羅山)’ 아래에는 도씨(都氏)의 중시조이자 고려시대 전리상서(典理尙書) 벼슬을 지낸 도충박(都忠朴)의 묘소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 아래쪽으로 촌민들이 화산불이라고 부르던 야트막한 산기슭 아래에 동해의 너른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세세손손 이어져온 염전(鹽田)마을이 있었다.


#1. 고된 노동으로 탄생한 소금

구름 한 점 없는 동해 바닷가엔 햇살만이 쟁쟁했다. 조그만 나무그늘 하나 없이 드넓게 펼쳐진 해안가 공터엔 한 아름이 넘음직한 커다란 무쇠 가마솥 이십여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걸렸다. 가마솥을 달구는 생나무 연기가 염천의 하늘을 가리며 시커멓게 솟구쳤고, 바닷물로 채워진 가마솥에선 수증기가 끊임없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베옷을 걸친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이마며 목덜미를 적시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가마솥을 중심으로 서너명씩 조를 이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들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고 열서너 살도 채 되지 않은 듯한 어린 소년과 장가 못간 떠꺼머리 총각도 보였다. 또 부부인 듯 보이는 아녀자와 중년사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대로 소금을 굽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지경리 염부(鹽夫)들이나 관에서 보낸 관노비들이었다. 하나같이 검게 탄 피부에 고된 중노동에 시달려 초췌한 몰골, 깡마른 몸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저마다 맡은 일에 매달렸다. 어떤 자들은 하루 온종일 가마솥에 불질을 했고, 어떤 자들은 무릎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 물동이에 가득 담은 해수를 담아 와서 벌겋게 달아오른 가마솥에 부었다. 또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멀리 배를 타고 나가거나 혹은 수레나 지게를 이용하여 땔나무를 실어 나르는 축도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소금을 굽는 제염작업이었다. 도로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소금은 매우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직접 관리로 하여금 전매를 하게 했으며, 시중에선 쌀이나 포목처럼 재화의 가치를 지니고 통용되었다.

이처럼 귀한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금 광산이나 염호(鹽湖)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소금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염전에 바닷물을 가두어두고 써레질을 하며 일정 시간 햇볕에 증발시켜 제염을 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이다. 다른 하나는 바닷물을 길어다가 가마솥에 넣고 주야로 쉬지 않고 계속 끓여서 졸여 소금을 얻는 자염법(煮鹽法)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평안도나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가 해수직자법을 사용했고, 경상도 동해안과 남해안은 자염법을 사용하여 소금을 생산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조정에서는 거친 바다에서 왜적을 방어하는 선군(船軍·해군)들에게 열악한 해상근무의 대가로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을 취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하지 못하도록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왕조가 안정되고 조정의 권력체제가 강화되면서 선군들의 군역(軍役)에 소금을 굽는 자염이 추가되면서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선군들이 그 역을 천시하고 기피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신량역천(身良役賤)에 따른 신분적 격하를 가져왔다. 차츰 선군이 맡았던 자염 부역은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연해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소금을 굽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염간(鹽干), 염한(鹽漢), 염정(鹽丁)은 본래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일이 너무 힘들고 고되었으므로 염부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따라서 제염작업을 책임진 염한호(鹽漢戶)를 제외한 나머지는 신분이 낮은 천민이나 관에 속한 공노비(公奴婢)들이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2. 정변에 연루된 양반가의 비극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점심시간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렸다. 노동으로 땀에 흠씬 젖은 염부들이 염전 한 구석의 취사장으로 서둘러 몰려들었다. 말이 취사장이지 나무로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대강 지붕을 인 허름한 장소였고, 점심이랍시고 무료로 나눠주는 음식은 묵은 조에다 해초를 넣어 끓인 멀건 죽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바다에서 물을 긷던, 잠방이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열대여섯 살 남짓한 사내가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백사장으로 걸어 나왔다. 비록 검게 탄 얼굴에 깡말랐지만 남달리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이름은 신유(申酉)였다.

그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양반가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있던 조부가 조정의 정변에 연루되었고, 정적의 모함까지 더해져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관노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단란했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몇 년간 흥해 관아에서 노비로 일하던 그는 몇 달 전에 염부로 일하던 부친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 관아의 수령에게 수차례 간청을 올렸고, 이곳 지경의 염부로 오게 된 것이다.

신유는 물동이에 담긴 바닷물을 가마솥에 차례로 부어넣었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치밀었고 매일처럼 무거운 물지게를 지느라 벌겋게 벗겨진 어깨의 상처가 쓰라렸다. 한 구석에 물지게를 벗어둔 그는 곧장 취사장으로 향했다.

“자네 부친은 좀 차도가 있는가?”

먼저 죽을 배급받아 들고 지나가던 얼금뱅이 노인이 신유를 보자 말을 건넸다. 김씨 성을 가진, 30년 넘게 염정으로 일해오던 지경 촌로였다. 불철주야 가마솥에 불을 때느라 땀과 연기, 수증기와 검댕을 뒤집어쓴 노인의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었다. 수염과 눈썹은 불에 그슬려 흔적만 남아 있다.

“쯧쯧, 남일 같지 않네.”

걱정스러운 신유의 표정을 바라본 김 노인이 사정을 알겠다는 듯 무겁게 혀를 찼다. 죽 한 그릇을 받아든 신유는 곧장 염전 부근의 움막집으로 향했다. 일정한 집도 없이 염전에 기거하는 염부들을 위한 거처였다. 왕골거적을 들치고 들어간 움막 안은 그나마 햇살이 들지 않아 바깥보다 덜 더웠다. 그러나 오래된 젖국처럼 시큼한 냄새가 훅 풍겨났다.

“죽 가져왔어요. 좀 드세요.”

평소처럼 거적자리에 누워 있던 부친에게 죽 그릇을 내밀던 신유는 자신도 모르게 짧게 숨을 삼킨다. 이미 부친은 차갑게 굳어 있다. 신유는 불현듯 뜨거운 오열이 목구멍에서 치솟는 것을 느낀다.


#3. 탈출을 결심하다

배가 외진 해안에 닿았다. 감시역으로 따라온 염간 정씨를 비롯한 인부가 하나둘 배에서 내렸다. 그 일행에 신유도 포함되었다. 신유는 톱과 도끼 따위의 연장을 메고 일행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배를 타고 염전과 멀리 떨어진 이곳 인적이 없고 수목이 무성한 산을 찾아온 것은 염전에 쓸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자염법으로 소금을 구우려면 엄청난 땔감이 필요했다. 소금 한 섬을 구워내려면 수백 말의 물을 끓여야 했고, 최소한 소달구지 열 바리 이상의 땔감이 필요했다. 염간 한 사람이 1년에 생산하는 소금량이 20섬이라면 땔감은 수백바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바닷물을 퍼오는 일보다 땔감을 구하는 게 더욱 힘든 작업이었다. 게다가 이미 염전 인근의 땔감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배를 만들고 소금을 굽기 위해 해안 산야가 헐벗자 조정에선 연안지역의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지령까지 내려두었다. 그런 까닭에 땔감을 구하려면 배를 타고 멀리 떨어진 섬이나 육지로 가야 했다.

‘유야, 아비 걱정은 말고 반드시 실행하여라.’

땔감을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신유의 귓전에 부친의 말이 들려왔다. 세상을 뜨기 며칠 전부터 부친이 간절하게 당부하던 말이었다. 사실 그건 그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대대손손 이어질, 힘들고 고된 관노비의 신세를 벗어나는 길은 멀리 도망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병든 부친을 두고 홀로 도망칠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4. 어사 신유, 지경리를 다시 찾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신유는 서둘러 깊은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저만치 뒤편에서 함께 온 인부들이 신유를 찾는 외침소리가 적요한 산골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후일 야사(野史)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한양으로 올라간 그는 어릴 적 알던 조부의 지인을 찾아갔고, 그 집안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타고난 재기와 총명함으로 학문을 연마한 그는 초시, 향시를 거쳐 스물세살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왕의 총애를 받아 어사가 되어 관동지역을 돌아보다가 지경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지경 촌민들은 신유가 염전 주변에 움막을 짓고 머물던 곳을 작은 어사터라 이름하고, 그를 기려 새로이 지은 와가가 있었던 자리를 어사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모든 게 불타고 파괴되고, 염전마저 없어진 터여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 뛰어난 학자였던 안축(1282~1348)이 안렴사(按廉使)로 관동을 돌아보다가 동해안에서 소금을 굽는 백성들의 생활상을 보며 적은 글이 남아 있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신산하고 고된 옛날 염부들의 생활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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