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2> 임진왜란 때 무명의 용사들이 맞서 싸운 ‘골곡포 전투’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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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03   |  발행일 2014-06-03 제15면   |  수정 2021-06-15 16:13
“고향마을 지키자” 무기도 수적으로도 밀렸지만 왜병과 밤새 혈전

<스토리 브리핑>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무려 7년 동안 조선의 강토를 피로 물들인 전란이었다. 

동해안 역시 왜군의 침략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민초들의 삶터는 지옥과 같은 전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의 침탈에 잠자코 있지 않았다. 홀연히 일어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스스럼없이 뛰어들었다.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2편은 왜군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친 ‘골곡포(骨谷浦)’의 의병과 포항 대진리 주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흥미를 위해 일부 인물은 가상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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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사이에서 ‘골곡포’로 불리는 포항 화진해수욕장 인근의 전경. 정확한 골곡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포항지역 향토사학계는 골곡포의 위치를 화진해수욕장 인근 화진해양훈련장 주변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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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2리의 포구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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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해양훈련장의 바위. 포항노거수회는 매년 현충일 이 바위 앞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1. 치열한 격전을 준비하다

초승달이 뜬 지는 이미 오래였다. 시간이 꽤 깊었을 것이다. 문득 바다 쪽에서 소금기를 머금은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별빛이 새어들었다. 새나 짐승들도 잠자리에 든 시간이라 사위는 더없이 조용했다. 가까운 사람의 숨소리까지 선명히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고요한 정적은 깨어지고, 처절하고 잔혹한 아비규환의 지옥이 그 끔찍한 입구를 열 것이다. 역겨운 피 냄새가 사방을 채우고 살이 찢어지고, 산 채로 목이 달아나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이 숲을 사정없이 흔들어놓을 것이다.

상상만으로 의병장 이무성은 목 안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내색을 않고 대신 두어 번 마른침을 삼켰다. 오자병서(吳子兵書)에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했던가. 모든 적과의 결전에는 항시 목숨을 걸어야 하며, 나의 목숨을 아끼면서 적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무성은 긴장된 마음을 스스로 진정시켰다.

흡사 담비나 스라소니처럼 잔뜩 몸을 낮춘 채 해송 뒤편에 숨어 있던 부장 최기정이 그의 눈치를 살피듯 잠깐 시선을 주었다. 벌써 10여 차례나 왜적들과의 격전으로 사선을 넘나든 적이 있는 담대한 그의 눈빛에도 오늘따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함께 의기투합하여 의병으로 나선 후 오늘이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목숨을 놓고 다투는 가열한 격전이 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무성은 고개를 돌려 뒤편 대동숲에 웅크린 의병들과, 오늘 자신과 함께 이 전투에 참가할 이곳 대전리 주민들을 살펴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생사를 도외시한 결의로 가득 찬 듯 여겨졌다. 그들은 이 지역 주민이자 일종의 민병이었다. 신분도 다양해서 농민이나 염전 인부, 송라 찰방의 관원과 도이봉수대의 봉수군, 갓 소년티를 벗은 어린 총각 등 다양했다. 또 왜적들의 방화로 불타버린 아룡사(亞龍寺)와 지정암(至精庵)의 승려도 서넛 있었다.

따져보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이들 민병은 사실상 이런 전투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또 손에 든 병장기라고 해봤자 대부분 관아 창고에 오래 묵혀두었던 삼지창이나 녹슨 장검 따위의 허접스러운 무기들이었다. 오직 하나 믿을 수 있다면, 자신들의 마을을 자신의 손으로 지켜내겠다는 뜨거운 용기와 결전의지였다.

만약 이들의 그런 자발적이고 용맹스러운 기세나 제의가 없었다면 이무성 역시 어두운 밤에 왜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습공격을 계획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삶을 반추하듯 이무성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2. 죽음보다 앞선 신의와 충정

오늘 낮, 잡목이 우거진 산굽이를 돌아 영일만의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샛길 초입에 다다랐을 때 돌연 의병부대의 앞길을 막으며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인근 마을의 주민인 성싶은, 낡고 꾀죄죄한 입성을 한 오십 중반의 남정네와 관원 복색의 사내, 그리고 열대여섯의 어린 총각이었다.

왜적을 만나면 싸우기 위해서인 듯 세 사람의 손에는 각기 창과 패도가 들려 있었다. 또 총각의 삼끈으로 묶은 허리춤에는 활과 전통이 달려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선두에서 길을 열어가던 의병장 이무성은 손을 들어 의병부대의 행군을 멈추게 했다. 이무성의 안전을 염려한 부장 최기정이 엄호하듯 이무성의 앞으로 나섰다.

관원 복색의 사내는 앞길을 막아서서 송구하다고 말하곤 어디서 오는 의병부대이며 행선지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사실 이무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영천과 하양 인근에서 모여든 의병들로 문경과 상주지역의 접경지인 당교(唐橋)에서 왜적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한 다음 울산의 도산(島山)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곳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들이 운집하여 성을 구축하고 있으며, 각지의 의병부대가 이를 쳐부수기 위하여 울산으로 모여든다는 전갈을 받고 다른 의병들과 합류하기 위해 동남쪽으로 나아가던 길이었다.

사정을 알게 된 중년 남자는 가까운 대전리의 양민들이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또한 지금은 송라의 민병대를 이끌고 있으며, 오늘 번차례가 되어 왜군들의 동향을 염탐하던 중에 이처럼 우연히 의병부대를 만나게 돼서 기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머지않은 화진리 해안 백사장에 왜군들의 보급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 따라서 왜군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단 자신들이 숨어 사는 장소로 가서 자세한 정황설명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임시거처는 바다와 인접한 골짜기로,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숲 속 공터였다. 대전리 마을에 집들이 있지만 왜군들의 잦은 침탈과 만행을 피해 숨어 사는 형편이라고 했다. 일전에도 불시에 왜군들이 들이닥쳐 미처 피난하지 못한 아내와 딸을 끌고 갔다고 중년 남정네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이무성에게 털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 왜군들을 공격할 계획을 짜던 중이었는데 이처럼 의병들이 와주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몸집이 날랜 정찰병 두엇을 보내 해안 백사장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동정을 염탐해본 결과, 예상보다 왜병들의 수가 엄청났다. 적게 잡아도 200명은 훨씬 넘을 거라고 했다.

상황을 보고받은 이무성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아무래도 상대가 될 수 없는 전투였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무기는 물론, 우선 수적으로 봐도 중과부적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의병이랬자 겨우 50명에 가까웠고, 전투에 자원한 주민들을 몽땅 합쳐도 100여명 남짓이었다. 게다가 주민 중 젊고 혈기 찬 사람들은 임진란이 있은 직후에 대다수 자진해서 의병으로 출정하고,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고령이거나 혹은 식솔이 딸리거나 어린 축이었다. 따라서 이제껏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해보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말이 민병이지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제 자리나 지켜낼지 의심스러웠다.

의병들의 의견 역시 둘로 나뉘었다. 불리한 형세지만 일단 왜적 보급부대를 목격한 이상 그냥 둘 수 없다는 측과 현재의 병력으로 왜적 정규군을 공격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므로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게 옳다는 측이었다.

“설령 이번 전투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우리 땅을 우리 힘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후일 의병들이 돌아오면 무슨 낯으로 대하겠습니까.”

이무성의 고민을 눈치챘는지 무리 뒤편에 잠자코 앉아 있던 어린 총각이 불쑥 말했다. 총각의 말에 불현듯 이무성은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왜란이 일어난 지 몇 달 되지 않던 임진년 유월경이었다. 경주 남천(南川)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가했던 그는 뜻이 맞는 의병들과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흥해 출신으로 호가 망모당(望慕堂)인 정삼외(鄭三畏)와 정삼계(鄭三戒) 형제, 청하의 김득복(金得福)과 아우인 김득상(金得祥) 형제와 성균진사인 김득경(金得鏡)이 그들이었다. 경주성 탈환에도 함께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의병들이었다. 그 외에도 영일 출신으로 의병장이던 김현룡(金見龍)과 아우 원룡(元龍), 사촌형인 현룡을 따라 의병활동에 뛰어든 김우정(金宇淨) 우결(宇潔) 형제도 있었다.

오로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놓인 나라를 구하려고 싸우는,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는 그들의 고향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무슨 할 말이 있을 건가. 그렇다. 신의와 충정이 우선이고, 죽음은 그다음의 일인 것이다.

#3. 무명용사의 함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때를 기다리던 의병장 이무성의 습격신호가 떨어졌다. 최대한 적진 가까이 매복으로 접근한 의병들과 민병들은 불시에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잠에 빠진 왜군들을 향해 해일처럼 짓쳐 들어갔다. 비록 수적으론 열세였지만 용맹과 사기만은 어느 군대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무섭고도 치열했다. 그것은 고향마을을 지켜내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불전불사의 용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불시의 습격을 받은 왜적들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이내 전열을 갖추고 반격을 서둘렀다. 조총이 공기를 찢고 칼이 바람을 갈랐다. 어둠 속에 화살이 날고 날카로운 창이 산 자의 몸통을 꿰뚫었다. 죽기를 각오한 의병과 민병들의 공세를 맞아 배수진을 친 왜적들의 일진일퇴의 격전은 동해가 푸르게 밝아올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날 밤새도록 이어진 이 격전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 누가 이기고 살아남았는지 전해지는 바가 없다. 어쩌면 승패를 전해줄 마지막 한 사람조차 살아남지 못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이날 밤 무명의 의병들과 대전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수많은 왜군과 벌인 가공할 대혈전을 ‘골곡포(骨谷浦)의 전투’라고 불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청하군수가 이 지역에서 전사한 자들을 위한 아군위령제를 거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울러 그들이 전투를 벌인 자리가 지금의 화진해수욕장 모래사장이며, 왜군 보급병들이 주둔하며 파둔 우물을 군정수(軍井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북풍이 강하게 불어 모래가 날리면 가끔씩 모래사장에서 인골과 활촉이 드러나고, 간혹 망자의 혼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지금도 바람이 부는 날이면 중국 명사산(鳴砂山)의 모래가 날리면서 나는 가녀린 소리처럼 나라를 위해 스러진 무명용사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포항시

 

◆골곡포의 정확한 위치는?
의병과 왜군이 혈전을 벌인 골곡포의 위치를 두고 포항과 영덕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포항시사(浦項市史)나 대동여지도 등 포항 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골곡포의 위치는 현재의 화진해수욕장 인근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왜군이 전투를 벌였고, 전사자들의 유골이 굴러다녔다는 이유로 골곡포라 불린다는 해석이다.

 

반면 영덕의 향토사학계는 골곡포의 위치를 포항과 달리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 발간된 ‘경상도 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에서 골곡포의 위치를 영덕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 골곡포의 ‘골곡’ 역시 ‘깊은 구멍’이나 ‘고랑’을 표현하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의견이다.

한편, 포항노거수회는 임진왜란 당시 골곡포에서 목숨을 바친 원혼들을 달래고 있다. 2000년 이후 매년 현충일 화진해수욕장 인근의 화진해양훈련장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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