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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1리에 있는 대전 3·1의거 기념관과 이준석 의사의 생가. |
◇ 스토리 브리핑
1919년 3월,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의 애국지사들은 독립의 염원을 담아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포항의 3·1운동은 기독교인·교사에 의해 주도됐는데, 경북에서는 대구 다음으로 빨랐다.
1919년 3월11일 포항면민(浦項面民) 만세운동에 이어 대전리 주민들의 만세운동까지 전개되면서 3·1운동은 포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영일군(옛 포항시)의 3·1운동 횟수는 총 9회에 이른다.
2천900명의 연인원이 참석했으며 40명이 죽고 380명이 다쳤다.
현재 대전리의 대전 3·1의거 기념관에는 대전리 출신 14인의 의사가 사용했던 유품과 판결문 등을 전시하고 있다.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3’편은 포항 3·1운동 확산의 계기가 된 대전리의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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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1리 두곡숲의 3·1의거 기념비 앞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1919년 3월22일, 청하 덕성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펼친 대전리 주민들은 3월27일 두곡숲에 다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기미년(1919) 3월 중순의 저녁 날씨는 옷깃을 여밀 만큼 차고 쌀쌀했다. 하지만 송라면 대전리(大田里)에 위치한 교회당 안쪽 내실에는 은밀하고 비장한 열기가 감돌았다.
유리 갓을 씌운 남폿불이 빛을 발하는 서너 평 남짓한 좁은 내실에 서로 무릎을 맞대다시피 앉은 세 사람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마침 모레가 음력 21일로 청하 덕성리(德城里) 장날이니까 그날이 거사일로는 가장 적합할 성싶습니다.”
스물 남짓한 청년이 단호한 결의가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영일 출신의 윤영복(尹永福)으로 이곳 대전리 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평소 성품이 올곧고 영민하며 통솔력이 있어서 대전리 교회신자들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에게 많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래선지 모임을 가질 때면 대부분 좌중의 의견을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그러하네. 아울러 거사 단행시간은 사람들이 장터에 가장 많이 모여드는 오후 1시경을 택하는 게 좋을 듯하네. 그래야 장터 사람들의 호응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네.”
세 사람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서른 중반의 남자가 십분 동의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성명이 윤영만(尹永滿)인 그는 원만한 성품으로 대전리 교회 교사직을 맡고 있었다.
“이제 거사날짜가 확정되었으니 하루속히 다른 동지들에게 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정백용 형님과 이영섭, 안덕환, 이준업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은 이준석이 자네가 잘 맡아서 해주게.”
“염려 말게. 그날까지 최대한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 당일 장터로 달려가겠네. 그런데 그날 사람들에게 나눠줄 국기가 부족한 듯싶어서 그게 걱정일세. 이삼일 상간에 만들거나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네.”
이준석(李俊石)이라고 불린 청년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청하 출신인 그는 윤영복과 오랜 동갑내기 죽마고우로 같은 교회 신자이면서 이번 거사의 주동자 역할을 맡은 몇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단아한 얼굴에 각진 턱을 가진 그는 생긴 외양만큼이나 성격이 과묵하고 추진력이 있어서 어떤 일을 맡든지 책임감 있게 잘 처리해낸다는 평을 듣는 청년이었다.
“그러게 말이네. 얼마 전에 삐라와 태극기를 빼앗기는 불상사만 없었어도….”
윤영만이 말꼬리를 흐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의 얼굴빛이 일순에 어두워졌다. 그저께 있었던 불상사를 떠올렸던 때문이었다.
“그나마 직공(直公) 선생이 일본헌병들에게 잡혀가지 않은 것만 해도 불행 중 다행한 일입니다. 오늘 모임이 끝나면 찾아뵙고 거사에 함께하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윤영복이 공경심을 담아 직공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는 이름이 오용간(吳用干)으로 일명 용수(用守)로도 불리는 청하 덕성리 출신의 오십 대 남자였다. 일찍이 한학에 통달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수차 받았지만 나라가 망하는데 벼슬 따위가 무슨 소용 있겠냐며 물리치고는 중국인과 동업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지냈다. 그는 평소 포항지역에 일본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식민자본을 밑천으로 어업과 상업분야의 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일본헌병들의 감시대상 인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런 터에 일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배를 받는 몸이 되고 말았다.
#2. 뜨거운 조국애와 독립의지
얼마 전, 그러니까 기미년 3월1일을 기해 전국 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뒤로 포항에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포항 장날인 3월11일과 다음 날인 12일 양일간에 걸쳐서 포항장터(여천시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주동자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것이 포항지역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셈이었다.
이날 밤에는 북본동 교회 신도 수백 명이 교회에 모여 있다가 모두들 시가로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곧장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본헌병들의 제지로 해산된 일이 있었고, 포항 각 동에서 이에 호응하는 많은 동민들이 모여들어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이런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오용간은 청하면과 송라면에도 독립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친우인 김광재 등과 모의하여 시위에 사용할 국기와 삐라 3천매를 손수 제작하여 곧 있을 거사를 대비해 교회 마룻바닥에 숨겼다. 그러나 곧 첩보를 입수한 일경들의 급습을 받게 되었다.
그날 숨겨둔 태극기와 삐라는 압수당했지만 요행히 그는 헌병의 손에 검거되지 않았다. 헌병의 수배를 피해 달아난 뒤 그는 대전리의 약관유생(弱冠儒生)으로 알려진 이태하(李泰夏)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약관유생이란 뛰어나게 총명한 이태하가 어린 나이에 한학을 수학한 것을 추앙하여 붙여진 존칭이었다.
“아무튼 거사가 있을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번 직공 선생의 거사가 탄로가 난 다음부터 곳곳에 일본헌병과 순사들이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준석이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거사를 앞둔 청년 특유의 비장감과 항일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만일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건 일본헌병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는 게 아니라 사전에 발각되어 미처 거사를 치르지 못하게 될까 하는 점이었다.
“일본헌병들이 제아무리 독하게 우리를 탄압하고 옥죄어도 우리들의 이 뜨거운 조국애와 독립의지만은 꺾을 수 없을 걸세.” 격려하듯 두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교사인 윤영만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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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촌 표지석이 대전1리 마을 입구에 서 있다. |
마침내 약속한 거사일인 22일이 다가왔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오전을 넘기면서 덕성리 장터는 장꾼들과 장을 보러 나온 인파로 흥청거렸다. 개중에는 군중에게 나눠주기 위해 밤새 준비한 태극기를 보따리 속에 숨겨 가져온 윤영복과 오용간을 비롯한 이준석과 그의 동지들도 있었다. 그들은 장터를 구경하는 시늉으로 돌아다니며 시간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후 1시경이 되자 장터에서 힘찬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터져 나왔다. 대열에서 앞장을 선 사람은 오용간과 윤영복, 이준석, 안상종, 김유곤, 윤도치 등이었고 이태하, 안상종, 안도용, 이준업, 이영섭, 안덕환, 김만수, 김유곤, 정백용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영일 출신의 안천종은 미리 준비해온 태극기를 군중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넓은 장터 마당에 모여 서서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에 따라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상황을 주시하던 장터의 군중도 어느덧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짖었다. 군중의 호응은 물결이 퍼져나가듯 온 장터에 가득 퍼져나갔다. 오랫동안 억압받고 핍박받았던 한민족의 설움이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몇몇 사람은 감격에 겨워 남몰래 눈물짓거나, 또는 기쁨에 젖어서 덩실거리며 어깨춤을 추는 자도 보였다.
그러나 곧 거사를 보고받은 일본헌병과 순사 수십 명이 착검한 소총을 앞세우고 몰려왔다. 그들은 장터를 벗어나 대전리 다리를 향해 행진하던 군중 앞을 가로막았다. 군도를 빼든 헌병 우두머리가 해산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군중의 물결처럼 도도한 기세와 드높은 만세소리를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상황의 긴박함을 알아챈 헌병이 발사를 명했다. 요란한 총소리가 대전리 마을과 장터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지들과 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행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일본헌병은 총을 쏘는 한편으로 강제진압에 나섰다. 군도와 몽둥이, 소총을 앞세운 그들은 아무런 저항 의사도 보이지 않는 군중을 마치 짐승처럼 차고 때리며 포승줄로 묶었다. 쓰러지고 짓밟힌 군중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낭자하게 터져 나왔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일본헌병의 가혹한 탄압에도 꺼질 줄 몰랐다. 당시 흩어진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5일 후에 두곡숲에서 다시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대전리 지사들의 만세운동으로 촉발된 시위운동은 4월1일 연일읍에 수백 명이 모인 만세시위를 비롯한 오천, 대송 등지의 시위로 이어졌고, 4월2일에는 기계, 죽장, 신광, 흥해 등으로 확산되어갔다.
하지만 일경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애국지사들의 희생과 시련도 적지 않았다. 시위를 주도했던 이준석, 윤영복, 오용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사가 몇 년에서 몇 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그중에서 윤도치와 김유곤 등은 일경의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지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오용간은 일본헌병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정신을 이어갔고, 약관유생으로 추앙받던 이태하는 대전리 야학원을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매진하면서 대전 농우회를 조직하여 민족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3·1만세운동 출옥 인사들이 조직한 영일군 3·1동지에 참여,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또한 윤영복은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봉천에서 활발하게 독립사상을 펴나갔다. 돌아보면 기미년 3월22일 포항 대전리에서 있었던, 자신의 안위와 생명마저 도외시한 이런 독립지사들의 숭고한 정신과 뜨거운 항일의지야말로 대대로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값진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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