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2> ‘서울 가는 길’ 영남대로 구미 구간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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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23   |  발행일 2014-06-23 제13면   |  수정 2021-06-15 17:13
'민족의 젖줄’을 벗삼아… 선비의 꿈도, 보부상의 애환도 숨 고르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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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구미구간은 낙동강을 끼고 길게 뻗어있다. 구미로 들어선 조선시대 선비와 보부상들은 장천~산동~해평~도개를 지나 낙동나루를 건너 서울로 향했다. 지금은 옛길만 남아있지만 아직도 사람살이의 애환과 역사는 길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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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구미구간에 세워져 있는 서울 나드리길 유래비. 2002년 구미문화원이 영남대로를 재조명하기 위해 옛길 곳곳에 유래비와 표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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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브리핑>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간선로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길이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이어진 영남대로다. 960여리에 달해 ‘천리 길’이라 했고, 14일 정도를 걸어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남대로는 경상도 58개 군현과 충청도와 경기도의 각각 5개 군현에 걸쳐 있었고, 29개의 주요 지선이 이어져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출발한 길은 경남 양산을 거쳐 밀양 삼랑진을 지나 청도 팔조령을 넘어 달성 가창에 이른다. 그리고 대구, 칠곡 다부동, 구미 장천·해평, 낙동나루를 건너 상주로 향한다. 상주 사벌에서 함창, 문경 유곡동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는다. 새재를 넘으면 충청대로의 시작점인 충주와 용인을 지나 종착지인 서울에 도착한다.

영남대로는 풍운의 꿈을 안고 걸었던 선비의 과거길이었고, 등짐과 봇짐을 지고 다녔던 보부상의 길이었다. 또 영남지방에 부임되어 나아갔던 관리가 걸었던 길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서울을 향해 밀고 올라왔던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옛길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당시 사람살이 이야기는 여전히 길을 따라 펼쳐져 있다. 구미 구간은 낙동강을 끼고 길게 뻗어 있다. 대구를 출발해 구미 구간의 길을 걸었던 영남지역 선비의 여정을 되짚어본다.


 

 

#1. 과거 길을 걸어보다

아침 일찍 대구를 출발해 금호강을 건너 칠곡의 우암창을 지나 동명원현에 다다르니, 한낮이다. 배가 고프다. 주막에 들러 요기를 한다. 음력 오월이지만, 여름인 듯 해가 중천에서 지글거린다. 두루막을 벗어 괴나리봇짐에 싼 채 편한 옷으로 걸었지만, 햇빛을 받은 어깨와 머리가 뜨겁고, 등에는 진땀이 많이 난다. 점심 후 바로 일어난다는 게 더위 때문인지 얼른 엄두를 못 낸다. 잠시 주막의 마루에 기대어 쉰다. 아버지는 벌써 벽에 등을 붙인 채 잠이 든 모양이다.

소년은 주막 밖으로 골목을 지나 들판을 바라보지만,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농사는 아침저녁으로 몰아쳐 지을 뿐, 한낮은 집안의 대청 아래나 정자나무 그늘로 피하는 게 상책이라, 그런 모양이다. 갈 길이 멀어 지체하기 어려워서 아버지를 깨울까 하다가 하도 곤하게 잠이 들어서 잠시 그냥 두기로 한다.

소년이 아버지를 따라 먼 길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열다섯이지만, 몸이 가늘고 약골이어서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큰아버지의 회갑잔치에 참석차 문경까지 가는데 빠른 걸음으로도 꼬박 사흘이나 걸린다. 아버지는 그런 먼 길을 아들을 대동하고 나선 것이다.

“혼자 갔다 올 수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너도 가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자. 그게 장래를 봐서도 좋을 듯하다. 더구나 곧 과거를 보러갈 테니, 서울 가는 큰 길을 일부라도 알아두는 게 필요할 게다.”

아버지는 먼 길 가는 행랑을 미리 챙기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집안이 궁색하지만, 그래도 양반의 후예라고, 아버지는 소년을 일찍부터 서당에 보내고, 자주 서원에도 출입을 시켰다. 다행히 총명한 소년은 열심히 공부했고,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은근히 기대 섞인 눈길을 주곤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깨어나 기지개를 길게 켠다. 그리고는 봇짐을 짊어지고 길을 재촉한다.

“해지기 전에 장천까지는 가야 한다. 빨리 걸으면 밤늦게나마 인동까지는 더 갈 수 있을 게다.”

부자는 부지런히 걷는다. 그러나 너무 더워 자주 나무 그늘에 앉아 쉬다보니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장천까지는 사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성이 있는 가산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산기슭을 오래 걸어서 산모롱이를 틀고, 또 틀자 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개천을 따라 걸어가니 저만치 장천이 보인다. 역마가 있는 곳이다. 저녁 때라 마을에서는 실연기가 가늘게 오르고 있다. 여름이 가까워 해도 길어졌다. 해가 금방 저도 아직 훤하더니, 차츰 어두워진다.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이참에 세수도 한다. 그리고는 십여 리를 더 가서 한 집을 찾아간다. 인근에서는 드물게 기와를 인 큰 집이다. 아버지의 친구네 집이란다. 쉰을 넘긴 수염이 텁수룩한 한 사내가 아버지를 반갑게 맞는다.

“어서 오게, 자춘. 이 얼마만인가?”

자춘은 아버지의 자(字)이다. 아버지도 그의 손을 잡고는 반색을 한다.

“잘 지냈는가, 정우. 문경의 가형 회갑에 가는 길에 들렀네.”

“먼 길을 가시는군. 그래, 어서 들게. 오늘 밤은 여기서 묵세.”

“고맙네.”

사랑방에 들자 아버지는 소년에게 인사부터 시킨다.

“절을 해라. 아버지와 동문수학한 어른이시다.”

소년은 큰절을 올린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나선다. 아버지의 친구는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부자를 전송한다. 특히 소년에게 은근하게 정을 표한다.

“자네가 재주 있다는 얘기는 가끔 들었네. 나중에 과거보러 올라갈 때면 꼭 들르게.”

장천을 지나 인동을 우회하여 고리곡(해평)에 이르는 길은 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중간에 의우총(義牛塚)이 있어서 부자는 그 비를 찬찬히 읽는다.

“소의 무덤은 처음 봅니다.”

소년이 신기해한다.

“이 마을에 사는 김기년이라는 농부가 암소와 함께 밭을 갈던 중 호랑이가 덤벼들었단다. 놀란 주인 앞으로 암소가 나서서 호랑이와 대적했지. 다행히 주인은 살았지만 호랑이가 할퀸 상처가 컸지. 그 상처가 덧나 죽게 되자, 유언을 남겼단다. 그 소가 수명을 다하면 팔지 말고 자기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말이야. 주인이 죽자 그 소도 이내 주인을 따라 죽었지. 이에 선산부사가 이를 갸륵하게 여겨 화공에게 의우도를 그리게 하고 고이 묻어주었단다.”

고리곡(해평)에 이르자 해가 중천에 떴다. 부자는 주막집을 찾아 간단히 요기를 한다. 날은 어제보다 더 뜨겁다. 더위로 지친 부자는 잠시 햇볕이 숙지길 기다렸다가 가기로 하고 그늘에서 휴식한다.

다시 길을 나서 한참을 가니 도리사 입구다.

“저 개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도리사란다. 옛날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해질 때 지은 절이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도개인데, 고구려 승려 아도가 도개로 숨어들어와 처음 포교활동을 했단다. 거기 가면 옛날 우물터도 남아 있지.”

“왜 하필 이곳에 처음 절이 지어졌습니까?”

“이곳이 삼국시대 땐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대였지. 신라 도성에서 멀어 신라에 잠입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아도가 넘어왔을거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올 때 도개의 우물터들을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부지런히 걷는다. 길가에 또 무덤이 있다. 이번에는 개의 무덤이다. 의구총(義狗塚)이란 비석의 글씨가 뚜렷하다.

“개의 무덤이라니요. 참으로 신기합니다.”

소년의 물음에 아버지는 간단히 유래를 말한다.

“이곳 가까운 산양이란 마을에 노성원이라는 사람이 누렁이 한 마리를 길렀단다. 하루는 이웃 마을 잔치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도중 월파정 부근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단다. 이때 길섶에서 불이 났지.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그 개가 저기 보이는 낙동강으로 달려가 물을 묻혀 달려와서는 온몸으로 불을 껐지. 그렇게 하기를 수차례, 결국 불을 껐지만 개는 탈진해서 죽어버렸지. 주인이 잠을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알고는 크게 감동하여 관을 갖추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단다.”

“짐승도 그런 의리가 있다니, 사람으로서 부끄럽습니다.”

“그래, 그래.”

부자는 다시 산모롱이를 몇 번이나 감돈다. 이윽고 큰 강이 눈앞을 가로막고 흐른다. 강안의 절벽 위의 관수루(觀水樓)에 올라 거대한 강의 흐름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벌써 저녁 무렵이 되어 강 건너 하늘이 붉게 물들어 그 빛을 받은 강물이 빠알갛다.

“자아, 서둘러 강을 건너자. 강 건너 곧장 가면 상주니라. 오늘은 밤길을 좀 더 걸어서 최대한 길을 당겨야겠다.”

부자는 누각을 내려와 흰 모래사장을 밟고 나루터로 향한다. 나루터엔 이미 제법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있다. 사공이 마지막 손님을 태우려고 길게 소리를 지른다.



#2. 구미지역의 서울 가는 길

조선시대 구미 지역의 서울 가는 길은 대략 동명~다부원을 거쳐 장천~산동~해평~도개를 지나 낙동나루를 건너 상주로 향했다. 그 중간에는 장천의 장터마을과 의우총이 있어서 구경거리가 됐다. 또한 해평의 도리사 입구를 지나면 의구총이 있었다. 도개에는 도리사의 설화와 관련이 있는 모례마을이 있다. 현 낙단교가 있는 지역에 있었던 낙동나루는 제법 규모가 큰 나루로 많은 이들이 자주 이용했다. 특히 나루를 건너기 전 강 언덕에 세워진 관수루의 풍경이 볼만했다.

그러나 이렇게 잡아본 길은 개략적인 데 불과하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경국대전’과 영조 연간에 발행한 ‘속대전’에는 부산에서 서울 가는 길이 대·중·소로로 구분됐다. 그러나 대로만 명시됐을 뿐이어서 중·소로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부산(삼포)에서 서울 가는 길 가운데 선산 및 인동 지역은 중로의 한 통과지였다. 그 전에는 일본 사절객들은 주로 뱃길을 이용하여 상주 낙동에 이르고, 이후 상주읍을 거쳐 조령을 넘어서 충주로 나가서 한강에 이르는 길을 이용했다.

이후 길이 어느 정도 정비가 됐는데, 초기에는 부산포~동래~양산~밀양~청도를 거쳐 대구에 이르고, 이어서 구미 인동~상주~문경을 거쳐 충주로 이어졌다. 이 길은 임진왜란 때 왜병의 상경로로 이용됐다. 그중 인동은 수천 명의 왜병 주둔지였다. 인동이 상경하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정조 연간에 편찬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서울 가는 노정이 칠곡의 동명원에서 인동을 경유하지 않고 장천의 상림역과 해평의 고리곡, 여차리참을 경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약간 변경됐음을 알 수 있다. 다부역이 신설된 것은 인동을 거치지 않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인동은 교통의 요지로 여전히 자주 이용됐다. 인동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은 대구에서 금호강을 건너 칠곡의 우암창을 지나 칠곡의 동명원현에 이르고, 이어 장천~선산, 고리곡(해평)~해평 여차리점~낙동진(상주)으로 이어졌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 문헌 : 구미시지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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