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3> 의리를 지킨 소의 무덤 ‘義牛塚’과 개 무덤 ‘義狗塚’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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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07   |  발행일 2014-07-07 제13면   |  수정 2021-06-15 17:13
虎患에 맞선 소, 불길에 몸 던진 개 “갸륵한 희생… 사람 열보다 낫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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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의 무덤인 의구총. 의구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하고 있지만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의 무덤처럼 봉분이 남아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1. 사람과 함께한 소와 개의 의로움 기려

구미 지역에는 소의 무덤과 개의 무덤이 있다. 사람의 무덤들만 세상을 덮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동물의 무덤은 참으로 이색적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무덤은 희귀하긴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소와 개는 인간과 함께 한 역사가 아주 긴 가축이어서, 인간과 나누는 정도 별날 수 있기에 그만한 대접을 받을 경우도 종종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의 조상은 늑대다. 인류가 수렵채집 사회단계에 진입하면서, 사냥 후 먹고 남은 동물을 먹는 늑대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계속 인간의 거주촌 주위를 맴돌다가, 어느 순간부터 인간과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개는 인간이 먹고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 치우면서, 그 대가로 자신의 예리한 후각과 청각을 이용, 외부 침입자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사람과 친해지면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반려동물로 사랑받아왔다.

한편 소는 아득한 옛날부터 농경사회 노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개 다음으로 일찍부터 가축화됐다. 기원전 7천~6천년경부터라 추측되기도 한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사육되기 시작해 점차 동서로 퍼졌다. 농경에 사용하기 위해서, 또는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해서였다. 산업화 이전에는 달구지나 쟁기를 끄는 데에 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약 14억 마리의 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거쳐 인간과 친해온 동물들인 만큼 개와 소는 어느 동물 못지않은 영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주인을 위해 온몸으로 봉사하는 헌신과 의리가 강조되기도 했다.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개무덤(의구총, 義狗塚)과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있는 소무덤(의우총, 義牛塚)이 그 표상이다. 이곳에 있는 개의 무덤과 소의 무덤은 전국에서 유일한 동물의 무덤이 아닐까 한다. 충북 제천의 무암사에 소의 부도가 있긴 하다. 의상대사가 절을 지을 때 한 소가 홀연히 나타나 나무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절을 짓고 나서 얼마 후 소가 죽자 갸륵한 소를 기려 화장을 해주었는데, 여러 개의 사리가 나왔다. 소의 불심에 감동한 대사는 사리탑을 세웠다. 이 역시 인간을 위해 온몸을 아끼지 않은 소의 헌신과 의리를 기린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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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있는 의우총.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한 의로운 소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무덤 뒤쪽에는 충직한 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의우도가 있고, 비석은 인조 8년(1630) 선산부사 조찬한이 세웠다.
 

#2.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이야기 

 

옛날, 문수점(지금의 인덕리)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었다. 이 마을에 김기년이라는 사람이 암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소는 집안 농사일을 도맡아 해 대개 재산 1호로 꼽혔다. 기년은 자신의 소를 그런 재산으로서라기보다는 함께 농사를 도모하는 벗인 양 끔찍하게 사랑했다. 늘 풀을 넉넉하게 뜯어서 잘 먹였다. 여름에는 자주 인근의 냇가에 데리고 가서 목욕도 시켜주었다. 아침이면 함께 논과 밭으로 나가 종일 함께 일하고 저녁에는 함께 집에 들어왔다.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정이 어지간히 들었다.

어느 해 여름, 기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산비탈의 숲 속에서 소리없이 나타나 무서운 기세로 소에게 덤벼들었다. 다급하게 기년이 괭이로 호랑이를 치려고 허둥댔다. 그러자 호랑이가 방향을 바꾸어 기년에게 덤벼들었다. 호랑이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기년이 힘을 다해 양손으로 호랑이의 목을 잡고는 몸을 비틀었다. 호랑이가 사지를 버둥대며 할퀴어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는 죽는구나하고 체념을 하는데, 갑자기 소가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는 식식거리며 내달려와선 머리로 호랑이의 배와 허리를 마구 떠받았다. 그 바람에 기년이 호랑이에게서 떨어져 나와 나뒹굴었다. 호랑이와 소는 격렬하게 싸웠다. 마침내 호랑이는 피를 흘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는 한사코 따라 붙으며 머리로 호랑이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호랑이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기년은 겨우 일어났다. 호랑이에게 다리를 여러 군데 물린 것 같았다. 하지만 온힘을 다해 일어서서는 소를 껴안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기년을 보고 놀랐다. 의사를 부르고 치료를 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기년은 그 와중에도 이따금 방문을 열고는 우사에 있는 소를 바라보곤 했다. 그의 상처는 깊어 나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로부터 20일 후에 기년은 죽음을 맞았다.

죽기 전에 가족에게 말했다.

“내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소 때문이다. 얼마나 갸륵한 일이냐? 소가 사람 열보다 낫다. 내가 죽은 후 절대 소를 팔지 말아라. 늙어 죽어도 그 고기를 먹지 말고 반드시 내 무덤 옆에 묻어 달라.”

기년이 죽자 소는 먹이도 먹지 않고 계속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애절하여 누구나 눈시울을 적실 정도였다. 그러더니 결국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 놀랍고 감동적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관에 알렸다. 관에서는 사람도 하지 못할 주인에 대한 의리를 소가 했다며 널리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그리하여 인조 8년(1630) 선산부사 조찬한이 비를 세웠다. 숙종 11년(1685)에는 화공이 8폭짜리 ‘의우도’를 남겼다.

이 무덤은 봉분과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3년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봉분에 흙을 덧씌우고 새로 단장했다. 지름이 2m 되는 무덤과 그 앞에 비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는 가로 6.88m, 세로 0.8m, 폭 0.2m 크기의 화강암에 의우도(소의 충직을 그린 그림)를 새겨놓았다.


#3.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 이야기

선산 동쪽 연향(延香,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사는 우리(郵吏, 역참에서 일을 하는 하급 서리) 노성원(盧聲遠, 또는 김성원)은 자주 탄성을 내질렀다.

“그 참 신통한 영물이 아닌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누렁이(황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릴 적 시장에서 작은 새끼 한 마리를 사왔는데, 그 때부터 주인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주인이 밭을 가면 밭머리에서 종일 지키고 있다가 함께 돌아오는 건 예사였다. 먼 길을 갈 때도 돌아보면 저만치서 그를 따라와, 집안 사람을 불러다 개를 데리고 가라고 채근을 할 정도였다. 자라면서는 곧잘 심부름도 했다. 어지간한 것은 말만 하면 어디에 있든 물어다주곤 해서 인근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밤에도 언제나 그가 머무는 사랑채 마루 밑에서 자면서 그를 지키곤 했다.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잔치가 있어서 성원은 길을 나섰다. 말을 타고 가다가 동구 밖에서 뒤가 이상해 돌아보니 누렁이가 저만치서 따라오고 있었다.

“멀리 가니 따라오지 마라!”하고 손을 저었다. 그래도 따라오면 작은 돌을 던지며 돌아가라 했다. 그럴 때마다 누렁이는 주춤주춤 돌아가는 듯했지만 문득 돌아보면 다시 저만치 따라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잔칫집으로 향했다. 누렁이는 그 집의 삽작문 밖에 쪼그린 채 주인을 기다렸다. 성원은 잔칫집의 흥겨움에 겨워 춤도 추고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짠해서 고기와 밥을 따로 챙겨서는 누렁이에게 먹이기도 했다.

한낮이 지나 그는 잔칫집을 나왔다. 말을 탔지만, 그의 머리가 자꾸 말 등으로 꼬꾸라지곤 했다. 술이 취해서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낙동강 가의 풍경이 좋았으나 그걸 즐길 계제도 될 턱이 없었다. 그냥 말에 얹혀서는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다행히 말은 그를 태우고 집으로 가는 길을 놓치지 않았다. 간혹 어정거리면 누렁이가 왈왈대면서 바로 인도하곤 했다.

월파정 북쪽 길에서 그는 잠이 든 채 말 위에서 이리저리 쓸리다가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누렁이가 짖으면서 그를 깨웠으나 무더운 여름 기운에 취기가 더해 그는 정신없이 잠이 들고 말았다. 말은 저대로 집이 있는 동네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때 홀연히 들불이 났다. 주변 어디선가에서 불이 일어 점점 성원이 누운 풀밭 쪽으로 번져왔다. 날이 하도 맑아서 불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 기세가 만만찮았다. 불은 금방 성원이 누운 풀밭으로 번져서 타죽을 위험에 처했다.

큰 소리로 짖으며 주인을 깨우려던 개가 갑자기 강 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맹렬한 속도로 강에 몸을 던져 물을 적셔서는 다시 돌아와선 젖은 몸을 불길 속에 딩굴며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길은 쉬 사그라들지 않았다. 개는 몇 번이고 강으로 가서 몸을 흠뻑 물에 적셔서는 되돌아와 불구덩이 속을 딩굴었다. 그리하여 겨우 불길을 잡아 주인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알고는 개는 쓰러졌다. 기진한 것이었다. 개는 몇 번 눈을 떠서 주인을 애절하게 바라보다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한참 뒤에 깨어난 성원은 온몸이 젖은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바로 옆에 개가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자초지종을 비로소 알게 된 성원은 개를 껴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개를 안고 돌아와서는 관에 개의 시체를 담아서 정성들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 이야기는 금세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누렁이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개가 묻힌 무덤을 구분방(狗墳坊)이라고 불렀다.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이 1665년(현종 6) 고을 노인을 불러 의구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다.

1952년 도로에 편입되어 공사 중 비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일선리 마을 뒷산에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일선리 마을이 조성되자 1993년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현 위치로 옮겼다. 이장하면서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다.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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