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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위치한 기청산식물원은 야생화, 토종 들풀, 수목, 각종 꽃 등 2천500여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동산에는 딱따구리, 꾀꼬리, 뻐꾸기 등 다양한 새들도 서식한다. |
<스토리 브리핑>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기청산식물원은 귀중한 우리의 식물자원을 가꾸는 곳으로 ‘천연의 숲’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대 농과대학 출신의 이삼우 원장이 1965년 선친의 과수원을 인수한 후 다양한 식물을 심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기청산식물원은 야생화를 비롯해 토종 들풀, 수목, 각종 꽃 등 총 2천500여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과 식물원의 품에 기대어 사는 새들도 유명하다.
평지에 조성되어 가족단위 방문객의 관람이 수월한 데다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5편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었던 이삼우 원장과 그가 평생을 바쳐 가꾼 기청산식물원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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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우 기청산식물원장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낙향한 뒤 평생 동안 식물원 조성에 열정을 쏟았다. 이 원장은 현재까지 식물 관련 연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으며, 희귀·멸종위기식물의 보존에도 힘쓰고 있다. |
#1. 자연을 사랑한 소년
소년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자연을 좋아했다. 청하면 산자락을 적시고 마을 앞을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서정천의 투명한 물빛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야트막한 산과 넓은 들녘, 한가로운 하천 주변에서 철에 맞춰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며 절로 자라나 푸른 숲을 이루는 수목들에 한층 마음이 끌렸다.
그런 까닭에 또래의 아이들이 동네 골목이나 공터에서 놀이에 열중할 때에도 소년은 홀로 산과 들을 쏘다녔다. 주변에서 지천으로 자라나고 꽃을 피우는 갖가지 야생초와 식물들을 찾아내고 관찰했다.
소년이 보기에 흔히 접할 수 있는 야생초나 수목들에도 인간이 모르는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와 무궁한 조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삼월이면 언 땅을 뚫고 솟구치는 여린 새싹을 비롯하여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맞으며 바위틈에서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내는 한 떨기 야생화의 무구한 아름다움,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변덕스러운 소나기를 거치고, 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늦가을의 서리를 견디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야생 수목들의 소박하고 끈질긴 생명력에 소년은 항시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소년의 짐작으론 세상의 모든 식물은 무릇 생명에 대한 사랑과 헌신, 조화와 아름다움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싶었다. 풀과 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들은 각자 자기의 세계 속에서 꽃과 열매는 물론 나비와 벌, 곤충과 새, 동물들을 품고 키워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고유한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초연히 드러내고 있는 듯싶었다. 저마다 다른 원초적인 균형미와 생태학적 형태, 독특한 색깔과 개성적 향기가 그랬다. 따라서 영롱한 아침이슬을 머금은 푸른 잎사귀 한 잎에서부터 갈바람에 흩날리는 단풍나무의 표표한 자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수목들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봄여름, 가을겨울, 사계의 변화에다 흙과 바람, 햇살과 비의 조화로 빚어지는 각양각색 수많은 수목의 탄생과 성장, 결실과 동면이 소년에겐 마치 오래된 마법의 세계처럼 경이롭고 신비하게 여겨졌다. 일면 더없이 자유스러운 듯 보이는 그 생장과 번식, 개화와 소멸은 그러나 엄정한 법칙 아래 움직이는 자연의 합창이고 조화였으며 세상을 향한 무궁한 사랑이었다.
#2. ‘상록수’의 감동을 실천으로 옮기다
소년의 자연과 수목에 대한 유별난 관심과 사랑은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접어두어야 했다. 대구로 전학 온 소년은 여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공부에만 열중했다. 학교와 자취방을 오가면서 서정리 들판의 나무들과 야생화들은 잊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이유 모를 쓸쓸함과 공허감에 시달려야 했다. 야산과 들녘에 아름답게 자라나던 식물들은 가끔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소년은 남다른 외로움에 젖었고, 들판과 산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방학기간은 짧았고, 몇 년 되지 않아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있었고 학문에 대한 재미와 열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그의 마음은 들꽃이 흐드러진 마을 들판과 서정천 주변을 헤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뭔가 텅 빈 듯한 공허감이 마음 한구석에 섬백리 향기처럼 아련하게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우연히 소설을 한 권 읽었고, 평생 잊지 못할 정신적 충격으로 뇌리에 새겨졌다. 그것은 농촌계몽소설로 일컬어지는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였다. 그 소설은 그에게 미래를 밝혀주는 등대처럼 여겨졌다. 그는 몇 번씩 거듭해서 소설을 탐독하며 동혁과 채영신이 헌신적인 민족자주자애정신으로 농촌계몽활동에 뛰어드는 부분을 감동적으로 되새김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그는 장래를 놓고 갈등에 빠졌다. 그의 뛰어난 성적이라면 서울 유수의 대학 의과나 법과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선택할 것을 믿고 종용했다.
며칠을 갈등하던 끝에 그는 종내 서울대 농과대학에 원서를 내기로 했다. 단언컨대 그건 상록수를 읽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엉뚱한 결정에 집안 식구들은 물론 친한 친구들마저 그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심을 꺾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남들이 말하는 세속적 성공보다 나은,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건 어릴 적에 자연과 수목을 보며 자연스레 발효된 순수한 정신세계의 일환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학과공부를 하는 틈틈이 고향인 서정리에 내려와서 과수농원을 일구는 일을 시작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꿈이 자라나듯 조금씩 농원이 터를 잡아갔다. 마을사람들은 소위 명문대를 다닌다는 한 청년의 예상치 못한 행동거지를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그깟 농원 따위를 해서 무엇하겠냐는 눈길이었다. 저러다가 제풀에 곧 그만두겠지 하고 예단하는 주민도 없지 않았다.
#3. 오랜 꿈과 염원을 담은 ‘기청산 식물원’
주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대학을 졸업한 뒤 곧장 서정리로 귀향한 그는 본격적인 식물원 조성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막내인 관계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거의 없었지만 과수농원을 운영해서 생긴 돈으로 주변의 농토와 땅을 약간씩 사들이고 넓혀갔다. 그 땅에는 미리 연구하고 생각해둔 야생 초본류와 과수, 그리고 여러 종류의 희귀한 묘목들을 심고 가꿨다. 농대 임학과를 나온 게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키우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산림자연과 수목, 향토식물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애정은 시일이 지날수록 한층 넓어지고 체계화되어 갔다. 향토고유수목 연구개발사업에 착수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수목원이 미래를 향한 교육의 장이 되도록 다각적으로 구성하고 심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 시민들의 관람을 목적으로 하는 관광식물원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귀중한 식물자원을 보호하고 유익하고 고유한 식물정보를 연구, 보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또한 그는 과감하게 우리꽃 보급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식물원의 이름을 ‘기청산 식물원’으로 정했다. 알곡을 골라낸다는 의미의 한자 ‘기(箕)’와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청산(靑山)’을 합성한 것으로 좋은 식물과 선한 사람이 아우러지는 참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오랜 꿈과 염원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런 다각적이고 끈질긴 노력 끝에 기청산 식물원은 전체 면적 9㏊, 등록 면적 5㏊의 평지에 한국의 야생화와 토종수목 등 약 2천200종을 보유·전시하는 특색 있는 식물원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여섯째로 나름의 다양성과 주제를 가진 사립식물원으로 산림청에 등록되었다. 또 2004년에는 환경부로부터 멸종위기식물을 보전하는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받아 공익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천연의 숲처럼 자연경관을 지닌 기청산 식물원은 원장인 그의 계획에 따라 주제별로 크게 11개 전시공간으로 나뉘었다.
지구상의 고생대와 중생대에 번성했던 원시식물을 전시한 양치식물원, 수복초나 노루귀, 족도리풀, 산수국 등 국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을 모아놓은 자생식물원, 멸종위기식물 1급인 섬개야광나무를 비롯한 섬시호, 섬현상 등을 전시한 울릉식물원 등이 그것이다. 또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토종 약용식물이 주로 전시된 사상본초원과 상록활엽수를 전시한 아열대원, 용의 모습을 닮은 생태연못 용연지, 다양하고 독특한 식물의 향기를 즐길 수 있는 향기·향수원과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을 전시한 멸종위기식물원, 해변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모아둔 해변식물원과 외래식물군이 어우러진 글로벌가든 등이 있다.
그 무엇보다 기청산 식물원 관람의 백미는 자연을 아끼고 수목을 사랑한 한 소년의 꿈이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거뒀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사계절 내내 꾀꼬리와 후투티, 동박새, 딱새 등 다양한 새들과 함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식물자원의 보고(寶庫), 혹은 야생초와 수목들, 새들의 유토피아라고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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