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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응척의 한시에 나오는 명경당. 구미 해평면 괴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학자 박운의 서재로, 고응척은 명경당의 연꽃을 보며 그 감흥을 시로 풀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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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당에 걸려있는 고응척의 한시(점선 안). 작품 속에는 자연 속에서 성정을 기르는 고응척의 내면이 드러난다. |
#1. 고응척(高應陟), 학문에 빠지다
고응척(1531~1606)은 호가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다. 아버지는 몽담(夢聃)이다. 김범(金範)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고향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함흥교수가 되었다. 1563년 사직한 뒤 한동안 시골에 묻혀 도학을 연구하고,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어 교훈시를 만드는 등 사상체계를 시·부(賦)·가(歌)·곡(曲) 등으로 표현했다. 1595년(선조 28) 풍기군수에 이어 회덕현감·사성 등을 역임하고 낙향하였다. 160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바로 사직했다. 저서에 ‘두곡집’이 있고, 시조 작품으로 ‘도부(道賦)’ 등 28수가 전한다. 1702년(숙종 28) 선산 낙봉서원(구미시 해평면 낙성리)에 제향되었다.
그의 학문과 관련된 얘기들이 꽤 전해진다.
12세가 되던 해에 김범에게서 ‘중용’을 배우고자 했다. 이에 김범은 “중용은 은미하고 오묘한 글이기에 어린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고 했다. 고응척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 바로 ‘도자부(道字賦)’ 70여구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부했는데, 주로 ‘중용’과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심화시켜나갔다. 특히 고금의 글들을 뽑아 모은 글과 자신이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오직 사서와 오경에 몰두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주와 굴원, 한유, 유종원, 소식, 황정견, 이백, 두보 등 여러 대가의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중용’과 ‘대학’에 제외되고 배치된다하여 대체로 보지 않았을 정도였다.
특히 그가 남긴 28편의 시조는 국문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주로 ‘대학’의 뜻을 짚는 내용이 많아 특이한 시세계를 드러낸다.
한 권 대학 책이 어찌하여 좋은 글고
나 살고 남 사니 그 아니 좋은 글가
나 속고 남 속일 글이야 읽어 무엇하료
격치(格致)로 눈을 떠서 성의(誠意)로 걷게 하니
눈 뜨고 걷거니 문에 아니 들어가랴
어째서 고금(古今)에 사람은 못 보고서 닫는다
30대에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앞의 시조는 ‘대학곡(大學曲)’으로, 안으로 인격을 갈고닦아서 밖으로 남을 살리고 속이지 않는 문장을 강조한다. 뒤의 시조는 ‘입덕곡(入德曲)’으로 ‘대학’에서 말한 명덕(明德)을 밝히는 요체인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강조한 것이다. ‘눈을 뜨고 걷는’다는 건 제대로 알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세상의 이치가 온전히 잘 보인다는 뜻이다. 그 바른 눈과 바른 실천이야말로 군자의 본 모습이며, 그러한 태도가 바로 진리를 향한 길을 가는 당당한 모습인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하고 한탄한다.
한편 우주의 이치를 살핀 시들도 꽤 된다.
천지만물이 어찌하여 삼긴 게고
옥당금마(玉堂金馬)는 어디만 있느뇨
운산석실(雲山石室)이 간 데마다 높을시고
구부려 밭을 가니 땅이야 적다마는 우러러 바람 부니 하늘이 무한하다
내 빚은 한 말 술 벗님과 취하세다
이삼월 춘풍은 품에 가득하였거늘 구시월 단풍은 낯에 가득 오르나다
아마도 취리건곤(醉裏乾坤)을 나와 너와 놀리라
‘호호가(浩浩歌)’ 세 번째 시로 사설시조(또는 엇시조) 형식이다. 그가 술에 취하면 애들을 시켜 곧잘 이 시를 노래 부르게 했다고 한다. 천지만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과 인간사를 대비하면서, 밭 갈고 벗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에 취하는 삶의 당당함을 호기롭게 드러낸다. 초야에 묻혀 자연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장부의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낙동강 가에서 평생을 보낸 만큼 큰 강을 노래한 한시들도 꽤 남겼다.
성현의 글들 두루 읽어 터득했고
육도의 산천을 역력하게 보았네
한가로이 낙동강 위에서 잠자니
명월과 청풍이 배에 가득하네
(讀罷千篇聖賢/歷觀六道山川/閑眠洛東江上/明月淸風滿船)
만년에 지은 ‘자만(自挽)’이란 제목의, 자신에 대한 찬시이다. 학문에 빠져들어 평생을 보낸 뒤에 맞는 한가로운 만년의 기상이 드러난다.
괴이한 저 가을의 강
옅은 구름 연기같이 일어나네
음양의 조화를 보고자 하니
사람의 일은 파도 속에 배를 탄 것과 같네
(怪底秋江上/輕陰起似烟/欲觀奇化/人道浪乘船)
‘낙동강을 건너며(渡洛江)’란 제목으로 60세에 지은 시라 한다. 이 시는 앞의 시와 달리 한가롭지 않고 위태롭게 느껴진다. 앞을 보려하나 안개가 앞을 가려 가늠이 안되는 위험한 상황이다. 사람의 일이 참으로 위태위태한 지경임을 들어, 경거망동을 삼가고 언제나 겸허하며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시라 할 수 있다.
한편 한시 ‘명경당’은 자연 속에서 성정을 기르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명경당 앞에서 연꽃을 완상하니
향기로운 바람 불어 옷깃에 가득히 전하네
가슴 속의 밝은 달은 남들이 보기 어려우니
공연히 예쁜 꽃 짝하여 짧은 시편을 읊었네
(明鏡堂前得賞蓮/香風吹動滿襟傳/胸中霽月人難見/空對夭詠短篇)
명경당은 구미 해평면 괴곡리에 있는 박운의 서재다. 고응척은 명경당에서 연꽃을 보면서 그 감흥을 풀어낸다. 가슴속의 밝은 달은 알아주는 이 없으니 공연히 연꽃 향기를 들어 어떤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넌지시 말하는 것이다.
#2. 배움의 중요성을 깨닫다
고응척은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했다. 오기가 대단했다. 누가 자기를 깔보는 듯한 말을 들으면 참지 못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갱신시켜서 그러한 시선을 제압하고마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공부에는 영 열의가 없었다. 17세에 장가를 들면서부터 공부를 더욱 멀리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려댔다.
“아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걸 보니, 공부 잘하기는 영 틀렸네.”
처음엔 못 들은 척했으나 자꾸 들으니 속이 부글거렸다. 마침내 그는 공부를 해서 사람들의 놀림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도끼를 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무를 베어다가 손수 작은 집을 만들었다. 한 칸짜리 토담집이었다. 그리고는 집에 책을 안고 들어가자마자 문을 막아버렸다. 한쪽 벽에 겨우 조그마한 구멍을 위아래로 뚫어놓았을 뿐이었다. 위의 구멍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밑의 구멍은 음식 등을 들이고 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 들어앉아 꼼짝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1년 넘도록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집안 식구들과 이웃들은 끼니때마다 음식을 들이면서 걱정을 했다.
“건강도 생각해야지. 어서 나오시오. 공부할 방은 집에도 많지 않소?”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나를 식충이로 만들 작정이오?”
친구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면 토담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말했다.
“이제 얼굴을 봤으니 돌아가게. 각자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게 좋아.”
#3. 아들 고한운, 의병을 일으키다
고한운(高澣雲)은 고응척의 아들이다. 그 기개가 아버지 못지않았다. 1573년(선조 6)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갑과 1위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안현감이 되었다. 부안현감으로 있을 당시 왜병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오산에 진을 치고 선산·금릉·인동 등지의 선비와 흩어진 병사들과 함께 항전했다.
그가 병졸들을 이끌고 와서 금오산성에 진을 치니 김산, 인동 등지의 선비와 흩어졌던 의병들이 합세하였다. 처음에는 복병으로 여러 번 적군을 격파하여 식량과 가축을 탈환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와서 산성 안에서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골이 깊고 요충지이기는 하나 금오산은 사방이 불과 50리밖에 안 되어서 개령, 성주 등지의 병력을 집결시킨 왜병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성안의 형세는 위급해졌다. 대장 강순세, 유사 허국신이 퇴로를 개척하기 위해 적을 매도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둘 다 쓰러지고 말았다. 고한운은 야음을 타고 성을 무사히 탈출했다.
왜군들은 이내 금오산성을 함락, 안팎을 수색하여 남녀노소를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다. 곳곳에 불을 지르고 파괴를 일삼았다. 백성들이 왜군들을 무서워하게끔, 일부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잔인한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금오산성에서 잡은 장졸 60여 명을 선산읍 남문 밖 10여 리에 걸쳐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고한운이 이 광경을 숨어서 보고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결사대를 조직해서라도 끝까지 싸워야겠다.”
그는 최현을 만나 의논했다.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방도를 강구했다. 최현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인의예지를 배웠지만 무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참으로 한심하다. 우선 무기를 구해야 하였으므로 순찰사에게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소식이 없고, 경상우도에는 김성일이 순찰사로 있으면서 의사(義士)가 구름같이 일어났는데 좌도에서는 형세가 그렇지 못하다”라며, 고한운으로부터 들은 금오산성의 혈전과 분투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이를 순찰사와 경상감사와 도체찰사 등에게 여러 차례 올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반응이 없었다.
고한운은 많지 않은 의병이나마 독려하여 복병작전으로 적군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끝내는 안타깝게 병사하고 말았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 은필관의 ‘두곡 고응척 시문학의 배경과 시세계’
공동 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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