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3·끝> 고려와 후백제가 마지막으로 겨룬 ‘일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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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22   |  발행일 2014-09-22 제11면   |  수정 2021-06-15 17:59
“신검(견훤의 아들)을 토벌하라”… 견훤과 손잡은 왕건, 후삼국 통일 최후의 칼을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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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했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 어갱이들.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해 과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영남일보 DB>


#1. 왕건, 강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

서기 936년 9월. 가을이 무르익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수확 철이지만, 농부들은 애를 태운다. 바야흐로 큰 전쟁이 벌어질 조짐이어서 동원령이 떨어진 가운데, 모두 창검을 손질하기에 바빴던 게다.

왕건은 천안부에 군사들을 집결시킨다. 지난 6월 태자 무와 박술희 장군이 보병과 기병을 주둔시켜서 조련하고 있던 곳. 군사들을 점검한 그는 바로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구미 선산지역)으로 이동한다. 일선은 후백제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으로, 견훤의 아들 신검이 새롭게 발흥하고 있었다. 왕건은 문경으로 해서 상주를 거쳐 선산으로 들어와(일설에는 문경~안동~예천~의성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의 신검 군대와 대치한다.

왕건은 임시 막사 안에서 다소 느긋하게 전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어쩌면 이번 전쟁은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창과 칼을 겨누었던 견훤이 투항을 해온 것이다.


낙동강? 감천? 일리천 위치 의견 갈려
‘어갱이들’‘발갱이들’‘점검평야’ 등
일리천 전투 관련 지명 여전히 전해져


고창(古昌·안동)전투에서 왕건과 견훤은 한때 피나는 고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견훤은 대패했고, 도주했다. 그후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고창전투의 대승은 뜻밖에도 많은 이득을 가져와 고창 일대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했다. 다른 군현과 성도 고려에 투항하는 수가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대업의 실마리가 뜻밖에도 견훤에 의해 풀리기 시작했다.

견훤의 집안싸움이 그런 기회를 가져왔다. 견훤은 막내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장남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시키고는 왕이 되었다. 사위 박영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견훤은 곧바로 개경에 연락해 투항 소식을 전했다. 왕건을 만난 견훤은 비통한 어조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아들을 잘못 두었소. 부디 신검을 토벌하여 주길 바라오.”

견훤은 거듭 요청했다. 마침내 왕건의 마음이 움직였다.

“좋소. 함께 전투에 임해서 신검을 잡읍시다.”

그렇게 해서 왕건과 견훤이 나란히 고려군 진영의 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누가 막사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오시오.” 왕건은 반색을 한다. 견훤이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곧 일어날 전투에 대해 의논을 한다.

“우리는 함께 중군을 맡을 것입니다.”

왕건은 견훤에게 웃음을 지어보인다. 견훤은 고개를 끄덕인다.

고려군 9만명(삼국사기에는 10만7천명 또는 8만6천여명)의 진영이 짜여진다. 기마군 1만명과 보병 1만명으로 좌강(左綱·좌군)을 삼고, 역시 기마군과 보병 2만으로 우강(右綱·우군)을 삼는다. 중군으로는 기마군 2만과 기병 9천500여명을 배치한다. 이 밖에 보병 수천 명과 여러 성의 원병군 1만여명이 참가한다. 이 전투에 참가한 군대는 고려군과 지방 호족의 군대는 물론, 926년 거란에 정복당한 후 고려 땅으로 대거 옮겨 온 발해 유민도 포함되어 있다. 중군에 배치한 후삼국 최강의 장수 유금필이 이끄는 말갈기병도 눈에 띈다.

고려의 각 부대는 깃발을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드디어 사열이 시작된다. 왕건과 함께 나타난 견훤을 보자 군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적장이 우리 주군과 함께 있단 말인가?”

“글쎄, 견훤이 우리 주군에게 투항을 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우리 주군에게 부탁을 했다는군.”

“그래? 그럼 우리가 유리하겠네!”

견훤이 투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려군은 사기가 오른다. 왕건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장성들과 군사들을 독려한다.

고려와 후백제의 부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왕건은 강 건너 자욱한 먼지에 휩싸인 후백제군을 보면서 이제 대업을 이룰 때가 머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것에 자극받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 얼마전이다. 경순왕은 친히 개경으로 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후백제만 평정하면 천하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후백제 신검의 부대는 강 건너 유난히 깃발이 많이 펄럭이고 있는 부대의 중앙을 유심히 살핀다.

“왕건의 옆에 있는 장수가 누구냐?”

신검의 물음에 누가 대답한다.

“폐하, 상왕전하입니다.”

“뭐라고?” 신검은 크게 놀란다.

왕건으로 보이는 갑옷 입은 이의 옆에 선 이가 견훤인 것을 알아본 군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왕이 저기에 있다. 어떻게 된 셈인가?”

군인 사이에 급속하게 퍼지는 온갖 유언비어를 신검은 안간힘을 다해 막는다.

“우리를 배반한 늙은이일 뿐이다. 동요하지 말라!”

그러나 ‘고려진이 10만 대군인 데다 우리의 왕이 직접 그 대군의 일부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후백제 진영에 퍼진다.


#2. 왕건, 마침내 후백제를 멸망시키다

마침내 고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리면서 자욱하니 먼지가 인다. 먼지 속으로 반짝이는 창검이 살기등등해진다. 그러나 후백제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면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갑자기 고려군의 진영으로 백기를 든 군대가 먼지 속에서 나타난다. 고려군이 창검을 겨누며 그들을 막는다. 백기를 든 군인들이 말에서 내려서는 꿇어 앉는다.

“우리 백제의 왕을 뵈러 왔소!” 누가 소리친다.

견훤이 나서자 그들은 일제히 견훤의 말 앞에 엎드린다.

“그대들은 누군가?” 견훤이 묻는다.

“백제의 좌장군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입니다. 저희는 고려군에 복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 백제의 왕 신검은 패륜아니라. 그리니 정통성이 없느니라.”

“맞사옵니다. 우리 장병들도 그 점에서 신검 왕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항복은 대번에 고려군 진영을 흔든다. 고려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왕건이 나선다.

“신검은 어디에 있는가?”

“중군 속에 있습니다.”

“적의 중군을 좌우에서 협공하여 격파하고 신검을 잡아라!”

고려의 기마군과 보병이 후백제군의 중군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한다. 전세는 고려에 유리해진다. 후백제군은 우왕좌왕한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후백제군을 유린해 후백제의 장수인 흔강(昕康)과 견달(見達) 등을 비롯하여 군사 3천200여명을 사로잡고 5천700여명의 목을 벤다.

후백제군은 지휘체계가 흔들리면서 교란이 일기 시작한다. 고려로 투항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기네끼리 “항복하자” “안 된다.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다투는 지경으로까지 이르더니 결국 서로 창을 겨누면서 싸움을 벌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신검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린다. 군사들은 먼지 속에서 퇴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면서 숱한 사상자를 낸다.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고려군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죽이거나 사로잡는다. 후백제군은 밤낮없이 달아나 황산군(黃山郡·충남 논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炭嶺·대전 동쪽 식장산)을 넘어 마성(馬城·옥천)에 주둔한다. 그러나 추격의 끈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는다. 신검은 비통한 심정으로 추격군의 동태를 묻는다.

“그들이 어디까지 따라붙었느냐?”

“황산에 이미 도달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완산주로 오는 길목이 아니냐?”

신검은 절망적으로 외친다. 후백제의 본거지인 완산주가 점령되면 더는 어디로 갈 데도 없다. 신검은 칼을 꺾는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황산으로 가자.”

신검은 아우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데리고 왕건 앞에 엎드린다. 비로소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한다. 포로가 된 병졸은 모두 풀어준다. 항복해 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한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 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인다. 신검은 항복했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인다. 자신이 이룬 대업이 자신의 대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게 너무 마음 아팠다. 거기다 몸도 등창이 매우 심하게 나는 등 만신창이가 된다. 그리하여 황산의 한 절에서 쓸쓸히 사망한다.


#3. 당시와 관련된 지명 곳곳에 남아있어

‘일리천 전투’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다. 그 현장인 일리천이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현 낙동강을 지칭한다는 설도 있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구미지역에서는 낙동강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일리천 전투와 관련된 지명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의 부대가 집결한 곳은 지금의 고아읍 일대다. 고아읍 관심리 앞 들판을 ‘어갱이들’이라 한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 주둔시켰다고 해서 이곳을 ‘어검(御劒)평야’ 또는 ‘어갱이들’이라 한다. 또한 진을 쳤던 곳이 ‘장대(새도방)’다. 신검이 송림리 앞들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군사를 괴평리로 옮겨 배수진을 친 곳이 ‘발검(撥劒)평야’, 곧 ‘발갱이들’이 된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 서쪽 낮은 구릉으로 진격해 기습 작전을 펴서 점령한 곳이라 해서 ‘점검평야’ 곧 ‘점갱이들’이라 한다. 이들 지명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주민에 의해 불리고 있다.


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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