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우 1등급 갈빗살을 아주 싸게 내놓는 이유는…

  • 이춘호
  • |
  • 입력 2014-11-21   |  발행일 2014-11-21 제41면   |  수정 2014-11-21
‘Mr. 막 퍼주자’ 최순진 ‘팔공댐 고기나라’ 대표의 우여곡절 식당 개업기
●Tip…‘팔공댐 고기나라’에 오면
초등 중퇴 ‘7전8기 오뚝이 인생’
공원·월부장수 등 온갖 일 경험
물건 파는 일 누구보다 자신있어
팔공산 초입 70년대식 양옥집 사
싸고 맛있고 친절한 고깃집 차려
“왜 싼 가격에 한우 파느냐고요?
고깃집, 집세없으니 내 놀이터
좀 덜 남긴다 생각하니 맘 편해”
20141121
갈빗살처럼 붉은 빛의 상의와 머플러를 두른 최순진 사장.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비록 탁월한 요리 테크닉은 없지만 모든 손님을 상전으로 모시는 영업전략과 다른 고깃집과 달리 초염가 1등급 한우와 엣지 있는 곁반찬 라인, 추억의 정원과 골동품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20141121
‘팔공댐 고기나라’에 오면 70년대 대표적 양옥과 정원, 축음기, 각종 놋그릇, 농기구, 장수용 진검, 도자기, 공예품, 옹기 등 추억의 골동품을 만날 수 있다. 축음기도 들려준다. 이밖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 그리고 공산댐 축조 과정에서 수몰될 뻔한 각종 관상수, 고목형 음나무도 볼 수 있다.
20141121
‘팔공댐 고기나라’는 막 퍼주기 유전자가 남다른 사장의 독특한 영업전략에 의해 시중 고깃집보다 평균 30~40% 초염가로 내고 있다.
20141121
식당 옆 70년대식 정원과 양옥집.


그의 별명은 ‘Mr. 막 퍼주자’.

평소 붉은 남방을 즐기는 최순진씨(57). 나름대로 자수성가한 그만큼 우여곡절, 부침의 인생굽이를 돌아온 사람도 드물 것이다.‘7전8기 오뚝이 인생’ 주인공답게 그는 항상 ‘돈을 벌면 마당 넓은 집에서 싸고 맛있는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마구 퍼주는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고 독백했다.

그런 그가 간도 크게 팔공산 초입 격인 공산댐 바로 코앞에 얼마 전 고깃집을 냈다. 모두 고깃집으론 위치가 ‘꽝’이라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무척 지기가 센, 70년대식 주거문화를 잘 보여주는 정원 넓은 양옥집을 구입한 뒤 ‘팔공댐 고기나라’란 식당을 열었다. 그 양옥집은 지어질 때 그 언저리에선 첫 양옥집으로 소문이 났다. 그는 그 양옥 안 여러 방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흡사 행랑아범 방 같은 곳에 기거한다. 번듯한 방에는 그가 10여년간 애지중지 사 모은 수만 점의 골동품이 쌓여 있다. 아직 제대로 분류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그 골동품을 위한 자그마한 박물관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함께 세상을 등진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그 부모가 사용했을 법한 각종 물건으로 위안을 받고 싶었다. 양옥 현관 앞에는 물론 식당 주변의 정자, 담장 밑까지 각종 농기구, 옹기, 놋그릇, 조각품, 도자기, 금속공예품, 나무화석, 50~60년대 생활용품류 등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단골이나 희망자에 한해 몇몇 애장품을 직접 보여준다. 3층 구석방에는 팍팍한 그의 심신을 위로해주는 추억의 축음기가 있다.

그 식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잠시 기거했던 팔공보성타운 바로 옆에 있다. 수백 년 된 향나무, 단풍나무, 대나무숲, 음나무 등이 주변의 시선을 차단해 여기에 집이 있는지를 잘 가늠치 못하게 한다.

그는 솔직히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오너셰프는 아니다. 하지만 타고난 친근함과 수더분함을 갖고 있다. 그걸 장점으로 식당을 차렸다. 고깃집은 일견 다른 식당과 달리 요리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질 좋은 고기, 무게 대비 가격, 후식으로 나오는 된장맛, 그리고 마지막엔 주인의 ‘푸짐한 맘씨’라고 분석했다.

“저는 배운 것도 없어 어려운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친절해요. 험한 일을 어릴 때부터 해서 사람 상대를 잘합니다. 그것도 장점이죠. 그래서 저는 이제 요리 잘 하는 식당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요. 주방은 믿을 만한 사람을 기용하면 되고, 친절함과 저렴함, 그리고 나만의 골동품과 정원의 운치, 편한 주차장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싶습니다.”

초등 중퇴 ‘7전8기 오뚝이 인생’
공원·월부장수 등 온갖 일 경험
물건 파는 일 누구보다 자신있어
팔공산 초입 70년대식 양옥집 사
싸고 맛있고 친절한 고깃집 차려
“왜 싼 가격에 한우 파느냐고요?
고깃집, 집세없으니 내 놀이터
좀 덜 남긴다 생각하니 맘 편해”

◆ 자수성가의 팍팍한 인생살이

그는 평생 영업사원이었다.

물건 파는 데 올인했다. 사람이 어떻게 감동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한때 대구의 대표적 영업왕으로 여러 곳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빈궁한 집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때 팔달교 근처로 이사를 온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아 결국 중퇴한다. 고모집에 얹혀 산다.

12세 때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난다. 동생을 다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가장 신세로 전락한다. 고모 권유로 맨 처음 북구 노원동의 철강공장에 취직한다. 공돌이 인생, 그 1막1장이 개막된다. 친구와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배운다. 인생살이가 될 것 같지 않아 혼자 서울로 올라간다.

인천 보르네오 가구공장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운다. 4년 정도 일해 목돈을 잡는다. 하지만 중동 건설현장 미끼 사기꾼한테 70만원을 뺏긴다. 자살충동까지 느꼈고, 인간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술로 허송세월을 했다. 인천적십자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몇 번 더 자살 시도를 한다. 거기 수간호사가 딱한 사정을 알고는 동대구역까지 기차를 태워주었다. 북구 노원동 외삼촌 집에 무작정 갔다. 거기서 월부장수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장사는 잘 되냐”고 질문했다. “열심히만 하면 밥은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겐 ‘복음’이었다.

전라도 순창 사람인 그를 사부로 모시고 온갖 전자제품 등을 파는 월부장수의 길로 접어든다. 20대 초 무렵이었다.

리어카를 밀며 대구 전역을 누볐다. 당시 30여명이 함께 장사했는데 판매실적이 늘 2~3등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서구 비산동에 사무실을 차렸다. 잡화를 위한 종합상사 격이었다. 종업원 570명을 거느린 <주>수정유리의 영업과장으로 스카우트된다. 그때 매월 1억5천만~1억8천만원어치를 팔았다. 대구에선 ‘영업왕’으로 소문이 난다.

친구와 잡화 동업을 했는데 큰 실패를 한다. 지인 때문에 지하수 개발업자가 된다. 수도가 안 들어오는 곳에 가서 물을 퍼올려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물 잘 퍼주는 사나이’로 소문이 난다. 호경기를 맞았다. 그런데 무리하게 확장을 하는 바람에 또 사세가 기울어 힘든 시절을 맞는다.



지하수에서 벗어나 식품업계에 들어온다. 대구 리라제과 영업주임으로 각종 빵을 슈퍼 및 가게에 납품했다. 승승장구했지만 초등 중퇴인 그를 조직은 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공장을 나와 달서구 감삼동에 진양식품을 차려 찹쌀떡, 단팥빵 등을 판매했다. 돈이 모였다. 하지만 모 식품업체와의 송사 때문에 이겨놓고도 신용불량자로 추락했다. 다시 ‘암흑기’였다. 남구 이천동에서 미광식품 대구지사장이 됐다가 다시 IMF 외환위기를 맞는다. 2000년 그에게 남은 건 빈손뿐이었다.

송사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법원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우연히 시작하게 된 게 바로 보관창고다. 틈새시장을 잘 꾸려가 만족할 만한 사업을 이룬다. 하지만 자기 소유의 땅은 없었다. 창고 땅 주인을 만나면 항상 “비켜라”고 할까봐 식은땀이 났다. 그 와중에 지금의 양옥집을 갖게 된다.



◆ 식당 주인으로의 버거운 변신

일단 지기를 누르기 위해 사람이 북적거려야 한다.

고기 파는 식당이 딱이었다. 그가 영업을 시작하니 옆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난다. ‘터가 너무 세 일반인은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자신이 이 집을 못 살리면 그 누구도 살리지 못한다는 확신을 한다. 배수진을 친다. 급기야 ‘마구 퍼주자 스타일’의 숯불갈빗집을 차렸다,

“일단 제 집이니 임차료가 나갈 이유가 없고, 또한 덜 남으면 되니 일단 대구에서 한우 1등급 고기를 가장 싸게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고깃집만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봐요.”

그는 일단 고기는 정직하게만 들여오면 되니 속이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또한 자신이 외부 영업 하면서 숱하게 들락거렸던 것이 고깃집이라서 자신이 직접 차리면 집에서 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 가격보다 무려 40% 저렴한 한우를 내게 됐다. 시중에 2만여원 하는 1등급 갈빗살의 경우 처음에는 갈빗살과 등심을 100g에 8천원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수입고기가 아니면 터무니없이 가격을 내릴 수 없다고 공격했다. 지난 10월1일부터 1만원으로 가격을 올렸다. 지인들도 ‘너무 저렴한 식당은 하지 마라’고 충고를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어차피 집세가 안 나가고 고깃집은 내 놀이터로 생각하면 더 저렴하게 줄 수 있다”고 맞섰다.



◆ 포스 강한 곁반찬

곁반찬도 결코 허름하지 않다.

식재료 구입은 그가 직접 챙긴다. 제수품처럼 가격도 안 깎고 가장 상품만 고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먹을 음식이기 때문이다. 후식 때 나오는 된장은 여느 식당과 달리 예전 토장국 기운이 감돈다. 자투리 고기를 된장 끓일 때 활용한다. 식당 옆에 표고버섯 재배장이 있다. 그 버섯으로 직접 육수를 낸다. 화학조미료를 일절 넣지 않는다. 공장 된장 대신 수제 된장으로 국을 끓인다. 특히 홍어처럼 톡 쏘는 묵은지는 고향에서 가져온 것.

곰탕도 끓인다. 갈비짝이 오면 육부장이 직접 갈비를 장만한다. 남은 뼈를 36시간 고아 진국 곰탕을 낸다. 가격은 5천원. 너무 싸니 ‘진짜 곰탕 맞냐’고 다들 의아해하지만 먹고 나면 다들 입을 다문다. 4명이 오면 직접 숙성한 소스가 가미된 육회를 서비스로 낸다. 꽤 저렴하기 때문에 여느 회사 회식 장소로 제법 인기가 높다.

골동품과 70년대식 정원, 그리고 초염가 한우 고기의 묘한 만남. 저 우여곡절 사내의 믿음직한 ‘업보(業報)’인지도 모르겠다. (053)943-8888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