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5> 일제의 역사왜곡과 감문국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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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12   |  발행일 2015-08-12 제13면   |  수정 2021-06-16 18:08
임나일본부說에 목숨건 조선총독부…개령 일대 고분군 도굴하듯 파헤쳐
(‘4세기 日 세력이 가야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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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석실고분 내부의 모습. 1967년 이 고분에서 금제이식(귀걸이), 화살통장식,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안타깝게도 김천지역 고분 전체가 온전히 보존되지는 못했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고분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도굴 당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스토리 브리핑>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해 자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구실로 전국의 유적을 파헤쳤으며, 김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17년 김천을 찾은 일본인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는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을 일본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5편은 식민사학 연구에 감문국을 이용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관한 내용이다.



한반도 식민통치 정당화하려 학자 동원
1917년 장부인릉 등 유적 발굴조사 나서
감문국 통해 임나일본부설 증명 안간힘
“감천유역은 고대 日 보호로 후대 남아…”
어떠한 증거도 제시못한 채 억지주장만

학계 “애초 김천에 倭 있었단 전설 없어”
일제시대 연구방식의 불순한 의도 지적


 

 

#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라

18세기 이후, 서구 열강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과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근대 산업혁명을 일궈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국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 서구의 자신감은 부러운 것이었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역사적 열등감은 늘 고민거리였다. 조선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지만, 고대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가야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또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로도 불린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니 조선이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논리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한 실증적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임나일본부설은 역사를 도구 삼아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견주고자 했던 일본의 노림수였다.

1917년 경상도 일대의 유적 조사에 나선 역사학자 이마니시 또한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한 인물이다. 일본 기후현 출신인 이마니시는 일본 도쿄대 학부에서 사학을, 대학원에서는 조선사를 전공했다. 이마니시는 조선총독부 부설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회원과 경성제국대 교수로서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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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엄청난 양의 우리나라 유물을 전시·판매했다. 1941년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 리플릿. 아래쪽에 한문으로 적힌 ‘김천’이라는 지명이 눈에 띈다. 영남일보 DB

 

 

 

# 이마니시와 감문국

1917년 김천에 도착한 이마니시는 조선의 상황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10여년 전 경주를 방문해 신라 유적을 조사·연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니시는 얼마 뒤인 1913년, 교토대 조교수로 임명됐지만, 일본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조선행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황금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수많은 일본인이 문화재 약탈에 나선 상황이었다. 일부는 대구의 골동품점에 유물들을 팔아 큰 이익까지 남기고 있었다. ‘발굴’을 가장한 일본인들의 ‘도굴’에 조선의 강토가 신음하고 있었다. 학자인 이마니시조차 1906년 자신의 보고서에서 “경주에서 발굴이 성행해 이들 발굴품이 고물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밝혔을 정도다.

조선총독부의 ‘대정육년도(1917년) 고적조사보고(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에 따르면 이마니시는 경상도 발굴일정의 마지막 방문지로 김천을 선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사업’을 명분 삼아 조선의 유적을 발굴 중이었다. 이마니시가 김천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감문국이 고대 일본세력의 지배를 받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마니시는 김천 개령면 지역의 유적 일부를 직접 실측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제1호분과 서부리 장부인릉의 경우 직접 나서 조사했다. 이외에도 이마니시는 감문산성과 감문국 태자궁터 등을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언급하는 등 감문국 유적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마니시의 진정한 관심사는 감문국이 아니었다. 이마니시가 작성한 조선총독부 보고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김천 개령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감천유역은 일본의 보호 하에 감문으로 후대에까지 남아서 일본에 의해 백제에 주어진 지방인데, 개령이 감문국이었다는 전설(傳說)은 귀중한 것인데(중략) 감문천 하류인 개령이 오랫동안 신라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세력이 가라(가야)지방에 있었던 결과였다.”

보고서 내용은 이마니시의 감문국 유적조사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기초조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마니시는 감문국의 일본세력설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의 주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학계 또한 이마니시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계명대 사학과 발간 계명사학 23집에 수록된 논문은 “애당초 이 지역(김천)에 왜(일본)가 있었다고 본 일본학자(이마니시)의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설이나 유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전설을 바탕으로 연구결과를 도출한 이마니시의 연구방식이 조선총독부의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 지키지 못한 역사

이마니시의 김천 방문 후에도 김천지역에서 일제의 문화재 약탈은 지속됐다. 특히 개령면 일대는 김천에서도 큰 규모의 고분군이 형성돼 있어 일본인들의 관심이 매우 컸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이 고분 내부의 부장품을 가져갔다. 안타깝지만 주민들의 무지 속에 잃어버린 문화유산도 많다”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문 위원은 자신이 직접 들었다는 개령면 주민의 일화도 소개했다.

1930년대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당시 김천시 개령면의 한 농민이 양천리 고분군 주변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농민은 밭에서 넙적한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농사일을 위해 돌을 걷어냈더니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솟아나왔다. 놀란 농민이 김이 나온 곳의 구멍을 파보았는데, 오래된 무덤의 것으로 보이는 석실을 발견했다.

밭을 갈다 고분을 발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재소 순사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순사는 당장 농민의 개간작업을 중지시키고서는 전문가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데려온다. 그들은 곧 고분 안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고분 내부에는 일본인들이 놔두고 간 철갑옷 조각이 있었는데, 그 양이 두 가마니나 됐다. 그마저도 밭을 갈던 농민이 가져다 보관하다 마을에 들른 고물상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김천의 사례와 같은 일은 전국에서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조선고적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유물을 일본으로 보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조선의 유물들을 전시, 판매하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공동기획=김천시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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