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8> 무형문화재 제8호 ‘빗내농악’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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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02   |  발행일 2015-09-02 제24면   |  수정 2021-06-17 14:43
“군대훈련 형상화”…농사굿 아닌 강하고 민첩한 군사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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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5회 빗내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농악대원이 두 개의 북채를 들고 북을 치고 있다. 빗내농악의 북치는 방법은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데서 유래됐다.

 

 

■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1천500여년 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김천시민의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다. 

김천 특유의 가락과 정서를 담은 빗내농악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감문국 유산으로 알려진 빗내농악은, 1984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김천시사 등 여러 기록은 빗내농악에 대해 ‘농악의 역사는 삼한시대로부터 전해 왔다’고 적고 있다. 

빗내농악을 삼한시대 감문국의 군사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빗내농악은 농사에 지친 김천지역 민초들의 힘을 북돋워준 최고의 놀이이기도 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8편은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전해내려오는 빗내농악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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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내농악은 기본적으로 ‘진굿(군사굿)’으로 분류되는데, 농악대의 움직임이 마치 군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 감문국에서 비롯된 농악 

 

빗내농악은 김천시 개령면 광천2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농악이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빗내농악은 3~4세기경 신라에 편입된 읍락국가인 감문국의 군사활동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빗내마을은 옛 감문국의 도읍지 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신라·가야·백제와 접경한 감문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빗내농악의 원류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빗내마을 일원의 풍요로운 자연 또한 농악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김천의 젖줄’ 감천(甘川)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예전의 강 폭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1900년대 초까지 소금배가 감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등 빗내마을 인근은 물자의 이동이 활발한 물류의 거점이었다.


도읍지의 중심부인 빗내마을서 탄생
현재 개령면 광천2리 중심으로 발전
군사력 육성·과시 위한 목적서 출발

300여년 전 승려인 정재진이 재완성
별신굿·농악 결합 독특한 형식 눈길
북채 두 개 사용…남성·종교적 색채

이승만정권 땐 타파의 대상이었다가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목적으로 부활


오래전 감문국의 백성들 또한 감천의 수운과 충적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감문국의 주도권과 관련한 다툼도 있었다. 동사(東史)에는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국가 경영의 주도권과 관련한 군사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구전 역시 감문국의 군사적 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80여명의 결사대가 끝까지 신라에 항전했다는 구전은, 빗내농악이 군사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향토사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경상도 내륙의 전형적 풍물굿

빗내농악이 감문국에서 유래됐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현재의 형태가 삼한시대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대 빗내농악 상쇠이자 수다사 승려였던 정재진이 300여 년 전 빗내농악을 재완성했기 때문이다. 이후 빗내농악은 제2대 이군선·3대 윤상만·4대 우윤조에 이어 5대 이남문·6대 한홍엽·7대 한기식·8대 손영만 상쇠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빗내농악의 형식은 매우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별신굿과 농악이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내륙의 전형적 풍물굿인 빗내농악은 기본적으로 ‘농사굿’이 아닌 ‘진굿(군사굿)’이다. 농사굿은 모내기와 타작 등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진굿은 군대의 훈련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보통 40~50명이 모여 풍물패를 구성하고 인원 제한은 없다. 빗내농악의 전체구성은 1시간30분 정도지만 다양한 구성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놀이패는 흰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군대처럼 민첩하게 대형을 형성했다 풀기를 반복한다.

빗내농악 특징은 ‘강하다’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매우 남성적이며 종교적 색채가 짙다. 특히 북은 빗내농악이 지닌 힘의 원천이다. 북을 칠 때는 북채 두 개를 이용해 두 손으로 치는데, 전남 진도 등에서도 두 개의 북채를 쓴다. 또한 진도의 북 치는 모습이 화려한 춤에 가깝다면, 김천의 것은 소의 움직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하다. 빗내농악 제8대 상쇠인 손영만씨(52)는 “빗내농악의 북 두드리는 방법은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것에서 유래됐다.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 즉 축생들이 북소리를 듣고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환생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농악대가 쓴 흰 고깔에도 의미가 있다. 흰색은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을 상징한다. 웅장한 김천의 징소리 또한 빗내농악이 발산하는 힘의 원천 중 하나다. 예로부터 김천에서 생산되는 유기와 징의 품질은 유명했는데, 김천의 징에서는 ‘우~웅’하는 황소의 울음소리처럼 웅장한 소리가 난다.

◆ 현대사의 굴곡을 겪다

1945년 광복 이후 근대화의 흐름 속에 빗내농악이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졌지만 미국 유학파 출신의 이승만 정권은 농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제1공화국 당시 정부는 경찰 등 공권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미신 타파운동을 펼쳤다. 굿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빗내농악 또한 타파 대상에 포함됐다.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산업화도 빗내농악이 잊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북지역에서 섬유·전자산업 등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농악을 계승할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떠났다. 손 상쇠에 따르면 1962년 김천의 빗내농악단이 서울민족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끝으로 빗내농악은 오랜 침체기를 겪는다.

흥미로운 점은 빗내농악의 부활이 1979년 12월12일 군사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1981년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차단하고 지식인층인 대학생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국풍(國風)81’이라는 문화행사를 열었다.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행사에 동원됐고, 주최 측의 계산에 따르면 1천만명이 행사를 관람했다. 전 국민에게 건전한 전통문화를 보급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정부 주도의 행사로 덮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기조 아래 김천의 빗내농악 또한 재발굴될 수 있었다.

비록 안타까운 현대사의 굴곡에서 재조명됐지만 김천 시민들의 빗내농악에 대한 자부심은 굳건하다. 김천지역의 읍·면·동마다 있는 풍물패는 빗내농악에 대한 시민들의 열정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현재까지도 김천 시민들은 빗내농악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년마다 빗내농악 경연대회가 열리는데, 김천 각 지역의 풍물패가 갈고닦은 기량을 겨룬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 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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