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시대의 작자 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이충은 잡채를 헌납해 호조판서에 오르고 한효순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됐다” “산삼 정승을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수가 없네”라고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조롱조의 시구가 적혀 있다.
“사삼각로 권초중(沙蔘閣老 權初重, 처음에는 사삼각로의 권세가 중하더니) 잡채상서 세막당(雜菜尙書 勢莫當, 지금은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도다)”이라는 문구도 있다.
여기서 사삼각로는 한효순(광해군 당시 이이첨의 앞잡이로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시킨 자)을 말하고 잡채상서는 호조판서 이충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더덕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바친 한효순의 권력이 막강하였으나 지금은 잡채를 만들어 바친 호조판서 이충의 권력에 당할 자가 없다”며 광해군 일기에 잡채를 만들어 호조판서에까지 오르고 권력을 휘두른 이충을 빗댄 작자 미상의 시가 기록돼 있다. 거기에는 “한효순 집에서는 사삼으로 강정을 만들고 이충의 집에서는 채소에 다른 맛을 가미하였다는데 그 맛이 희한하다”고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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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채 |
우리나라 조리 용어 중에 ‘채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채(菜)는 나물요리를 말하는 것으로 무, 오이 등의 재료를 나물로 만들려고 가늘고 길게 써는 것을 가리킨다. 잡(雜)은 섞다, 모으다, 많다는 뜻이다.
잡채 조리법이 실린 최초의 문헌은 1670년에 발간된 ‘음식디미방’이다. 여기에 잡채는 꿩고기를 육수로 내고 고기를 잘게 찢어놓고 각색의 재료를 한 치씩 썰고 기름장에 볶거나 데치고 해 그릇에 담은 후 꿩고기 육수와 된장을 걸러낸 물에 밀가루를 섞어 걸쭉하게 만들어 얹어냈다.
잡채는 정조 임금 시절 을묘년(1795) 현능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해놓은 ‘원행을묘 정리궤’에도 등장하지만 오늘날의 당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국의 당면 역사는 중국에서 당면 기술을 배운 일본 사람이 1912년 평양에 당면 공장을 세우고 생산하면서부터다. 그 이전에는 중국인들이 소규모로 당면을 만들었다. 그 후 1919년 양재하라는 사람이 황해도 사리원에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광흥공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천연동결방식을 이용해서 대량생산을 했다.
탄수화물 위주인 당면 자체로는 요리가 쉽지 않아서 광흥공장에서는 소비를 촉진하고자 당면을 우리 고유의 음식인 기존 잡채에 넣는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면서 당면 잡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1924년에 발간된 ‘조선 쌍무 신식 요리 제법’이란 책에 잡채에 당면이 들어갔다는 최초기록이 있다. 한국인의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잡채다.
요즘에는 당면에 채소를 넣는 평범한 잡채에서 벗어나 해물잡채, 어묵잡채 등 다양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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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음식전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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