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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다시 가고 싶지만 이제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며 아쉬워하는 최수열(오른쪽)·남도련씨 부부. 이들은 고향에서 온 취재진을 집으로 초대했고,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옮겨진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경상도 문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중국 길림성 내 알라디촌의 동포들. 지금도 겨울이면 김장을 하고, 된장과 고추장을 마을을 찾는 손님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과 중국 내 대도시로 떠나면서 마을은 비어가고, 경상도 고유의 문화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中 길림성 경상도마을 알라디촌
한때 730여가구 2600여명 살다
젊은이 돈 벌러 떠나 곳곳 빈 집
200가구 600명 홀몸·祖孫가정
한옥민속촌엔 잡초·거미줄뿐
1948년 개교 조선족중심학교
학생 많아 일주일 운동회 옛말
전교생 수 초등 1·유치원 3명
“韓보다 오래 산 中 편하다”던
고향 예천인 최수열 할아버지
4년 전 고국방문 얘기에도 눈물
◆잡초만 무성한 한옥민속촌
중국 내 대표적인 경상도 마을인 알라디촌의 한옥민속촌. 2009년 중국 정부가 인민폐 2천만위안(약 36억원)을 들여 공사에 나섰고, 한국의 온돌전문가들이 나서 황토로 온돌도 깔았다. 2013년에는 한국문화체험이 가능한 숙박시설로도 활용됐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찾은 민속촌의 한옥지붕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마당에는 사람의 온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의 발길 대신 곳곳에 거미줄이 있었다.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2010년 10월, 이곳에서는 경북도 주최 <사>인문사회연구소 주관으로 ‘문화교류 한마당’ 행사가 열렸다. 알라디촌 소학교 학생들은 율동을, 경북도립국악단은 민요와 사물놀이 공연으로 마을 어르신들의 흥을 돋웠다. 알라디촌 노인회 어르신들도 고향에서 온 손님들에게 춤과 농악무를 선보이는 등 사람들로 가득찼던 공간이었다.
이 마을 손청송 서기(52)는 “1년 정도 한국 한옥 문화 체험과 숙박이 가능한 시설로 활용했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철수했다. 그 이후 사실상 방치된 상태”라고 말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 빈집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은 깨진 채 방치돼 있었고, 출입문만 자물쇠로 채워진 상태였다. 마을 안으로 5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학교. 입구에는 ‘알라디조선족중심학교’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옛말이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많아 이곳이 조선족 학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학생이 없어 그냥 ‘알라디조선족소학교’가 됐다.
1948년 3월9일 6개 학급, 190여명의 초등 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60년 중학교 과정을 열었다. 학생 수도 440명으로 늘었다. 75년에는 고등학교과정까지 신설돼 학급 수는 14개, 학생수 499명, 교사 34명으로 늘었다. 학생이 많을 때는 600명이 넘었다. 학생이 많아 일주일 가량 운동회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 학교의 운동회는 학생들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동네주민은 물론 이웃의 조선족까지 초청해 이웃 주민이 함께하는 잔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 1명, 유치원생 3명 등 전교생 4명이 전부다. 교사(6명)보다 적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는 유치원 과정만 남아 있다가 최근 초등학생이 전학을 와 초등학교 과정이 부활했다.
손 서기는 “조선족 동포가 많을 때는 730여가구에 2천600여 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200여가구에 600명 정도가 고작이다. 특히 한 가구당 1명만 살거나 노인 부부만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렇다 보니 알라디 인구는 계속 줄고 있고, 특히 경상도 마을의 문화를 이어나갈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족 3세대까지는 조선말과 중국말을 다할 수 있지만, 그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잃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고 싶은 한국, 익숙해져버린 중국
자식은 물론 며느리와 사위까지 대부분 도시와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면서 이곳에는 대부분 노인 부부 또는 이들의 손자를 키우는 조손가정이 대부분이다. 아주 어릴 적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고향 이야기를 전해들은 1.5세대가 조선말보다 중국말을 더 편하게 느끼는 조선족 4세대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운 조국으로는 자녀들이 돈을 벌러 떠났고, 발을 딛고 서있는 중국 땅에서는 손주들과 중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기억도 가물한 한국보다는 더 오랜 세월 살아온 중국 내 경상도 마을인 알라디에서 사는 게 더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고향 이야기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수열 할아버지(80)와 남도련 할머니(76) 부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 고향에 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지금에 와서 뭐할라꼬. 친구도 없는데 지금에 와서 뭐할라꼬”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는 예천, 할머니는 안동이 고향이다.
최 할아버지는 “태어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냥 살아온 곳이 더 익숙하고, 그게 고향이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1년 <사>인문사회연구소가 나서 진행한 고국 초청행사로 고향을 찾은 그는 기억에도 없는 조상의 산소 앞에서 “저 왔심더. 저 왔심더”라며 눈물을 훔쳤다고 할머니는 전했다.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또다시 작은 휴지를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손과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래도 태어난 곳이 고향이고, 그곳에 가고 싶은 게 당연하지”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최 할아버지는 “그때 중국에 오지 않고 (고향에서) 살기만 했다면, 그때 떠나지 않았다면”이라며 아쉬움이 가득 담긴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우리는 중국사람도, 조선사람도 아니야”라고 힘없이 말했다.
글·사진=중국 길림시에서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도움말=<사>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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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600명에 이르던 학생수는 이제 4명으로 줄었다. 얼마 전에 1명이 전학을 온 덕분에 초등학교 과정이 되살아났다. 이 학생을 위해 하루 2시간씩 조선말 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알라디조선족소학교 최영빈 교장이 칠판에 적힌 한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우리말·문화 가르치려 해도 학생이 없다”
■ 알라디조선족소학교
2010년 이후 신입생 뚝 끊겨
한글 수업 못하다 최근 재개
하루 2시간 수업 정체성 함양
한국과 경상도의 문화가 옅어지고 있지만, 알라디촌의 경상도 사람들은 오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어렵지만 조선말과 문화를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9일 오후 알라디 조선족 소학교 교실. 칠판에는 ‘ㄱ, ㄴ, ㄷ, ㄹ, ㅁ’ 등의 자음과 ‘ㅏ, ㅑ, ㅓ, ㅕ’ 등 모음, 그리고 ‘아이, 오이, 우유, 누나’ 등 간단한 단어 등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이 학교에서는 초등학생 과정 한글(조선말) 수업을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학생이 없어서다. 2010년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신입생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 하지만 최근 다시 한글 수업을 재개했다. 최근 한족소학교에서 이곳으로 한 명이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나이로는 3학년이지만,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1학년으로 전학왔다. 조선말 수업은 하루 2시간씩 빠지지 않고 이뤄진다.
덕분에 이 학교는 중국 정부 전산망에 다시 올라갔다. 초등학교 재학생이 없으면 전산망에서 사라지지만,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를 다시 기록한다. 또 중국 정부는 단 한 명의 학생이 있어도 학교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정부차원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또 이를 통해 다른 학생들이 더 올 수도 있을 것으로 학교 측은 기대하고 있다.
이 학교 최영빈 교장(52)은 “말을 가르치고, 문화를 가르치려고 해도 사람이 주체인데 사람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면서 “조선 민족의 장래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망하지 않고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중국 길림시에서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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