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윤 논설위원
경이로운 성장으로 100년 풍요를 누려온 인류는 기어이 개방과 협력, 공동 번영의 길을 포기하려는가. 풍요의 시대가 저무는 대신 21세기 돌연변이 자국 이기주의와 극우주의가 빠르게 번져 다른 나라의 부(富)를 약탈하고 있다. 파시즘적 패권전쟁이다. 이런 대전환기에 세계의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경주에 모여 인류가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난제가 쌓여 터질 듯 압축된 시점의 APEC. 어긋난 물꼬를 트는 역사적 변곡점이 될까, 강대국의 위협에 순치된 호사스런 외교 잔치에 그칠까.
주연급 배역은 정해졌다. 한국과 미국, 중국. 캐스팅된 배역은 아니지만, 까메오로 우정 출연한다면 주연급 못잖은 나라도 있다. 북한이다. 이들이 그려낼 세계 담론의 장, 경주 APEC의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하다. 분노의 사슬을 끊고 다시 민주적 연대와 지속 가능한 번영을 회복하려는 천년고도의 꿈이 세계인의 비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자유무역질서를 어떻게든 지켜보자는 논의가 많이 나올 것"(조현 외교부 장관)이란 예감에 주목한다. 미국은 APEC 참가국 대부분과 전쟁 중이다.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 들어온 미국이 '자유무역의 종언'을 선언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전쟁을 시작했다. 관세가 약탈과 협박의 신무기가 됐다. 다른 나라의 공장을 납치하다시피 끌어들이고 전리품 다루듯 수백조원을 그저 앗아가려 한다. 동양의 조공도, 서양의 '트리뷰트(Tribute·공물)'도 이러진 않았다. 한 나라가 전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건 것도 처음 본다. '무모함'은 이 전쟁의 특징이다. 오랜 친구도 예외 없다. 1극(極)의 공포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한 우리 사회 일각의 '오버 플레이'(과도한 행동)는 시원하지만 실은 염려된다.
APEC은 분노를 잠시 멈추는 시간이다. 더 멀리, 다시 함께 가는 지구촌을 위해. 경주 APEC은 '관세' '미·중 갈등' '북핵' 등 지구촌 화두의 분수령이다. 대화냐 대립이냐의 갈림길이다. 주최국의 역할이 가볍지 않다. 자임한 '페이스메이커'는 의전용 얼굴마담이 아니다. 역사적 무대의 연출가이자 담론 의제의 설계자다. 타임이 이재명 대통령 얼굴 표지에 제목으로 단 'The Bridge'(가교)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겐 한·미 관세협상의 종착점, 한·중 관계 회복의 시발점, 한반도 긴장 완화의 변곡점이다. 미·중 정상은 6년 만에 재회한다. 동시 방한은 13년 만이다. 빅2 간 관세 담판이 충돌의 장으로 변질되는 건 경계할 대목이다. 아직 상상의 영역이지만 북·미 깜짝 회동에 대한 기대도 숙지지 않는다.
그저께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한국과 함께 성공 스토리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를 비롯 젠슨 황(엔비디아)·팀 쿡(애플)·저커버그(메타)·피차이(구글)·에다 에디 우(알리바바)·추쇼유즈(틱톡) 등 '빅샷'들도 총출동한다. Bridge, Business, Beyond. 단 세 단어로 자신들의 역할을 압축한 CEO 서밋의 담론 주제가 이들의 탁월성을 웅변한다. 기업 혼자 풀기 어려운 관세 문제를 각국 지도자와 교류함으로써 해법을 찾고자 한다면 경주 APEC만한 적기, 적소가 없다.
10월의 마지막 밤은 축제의 밤이 될까. '눈을 뜨기 힘든/가을보다 높은/저 하늘이 기분 좋아~'로 시작하는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듣기에 딱 좋은 개천(開天)의 아침이다.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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