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4> 감문국의 전설 ④ 신라에 항거한 결사대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5-10-14   |  발행일 2015-10-14 제24면   |  수정 2021-06-17 15:10
왕의 항복 서명에도 “마지막 한 명까지 사로국(신라)과 싸우자!” 속문산성에 몰려든 민초들
20151014
김천시 감문면 속문산(백운산) 중턱에서 속문산성으로 향하는 등산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에 위치한 속문산성은 방어의 거점으로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영남일보 DB>

 

 

◇ 스토리 브리핑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이 3세기 초 신라에 의해 정벌됐다고 적고 있다. 감문국 패망과 관련한 전설도 전해내려온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감문국 병사와 백성 70~80명이 김천시 감문면 속문산 정상부의 속문산성에 모여 항거하다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감문국 병사와 백성의 원혼이 구름이 되어 산을 덮었다고 해서 속문산은 백운산(白雲山)으로도 불리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4편은 최후까지 감문국을 지켰던 결사대에 관한 내용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20151014
속문산(백운산) 정상부에 흩어져 있는 속문산성의 흔적. 감문국 결사대 전설과는 달리 학계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영남일보 DB>
 

◆ 감문국 최후의 군대 

 

서기 231년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햇살이 잘 들지 않는 숲 속은 오후 들어 몰려든 먹장구름으로 한층 어둑어둑했다. 곧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 듯 음산한 날씨였다.

자연석으로 축조된 산성 성벽에 몸을 숨긴 채 아래쪽을 주시하던 단오의 시선에 무장을 갖춘 한 무리의 병사들이 산비탈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다들 낯익은 감문국의 병사들이었고, 개중에는 평민 차림의 사내도 두 명 끼어있었다.

“너도 여기 와 있었구나.”

손을 번쩍 치켜드는 단오를 발견한 평민복의 사내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형님 아우 하며 지내던 을주라는 이름의,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삼십 대의 사내였다. 성문을 통과한 을주는 창을 든 채 곧장 단오 곁으로 걸어왔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라니. 나는 감문국의 백성이 아닌가.”

단오의 인사에 을주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을주의 눈빛에는 비장하리만치 단호한 항전의 결의가 내비쳤다. 사실 을주는 몇 년 전까지 감문국의 병사로 복무하였고, 나이가 차면서 퇴역하여 농부로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신라군의 침공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처하면서 비록 정규 병사는 아니었지만 직접 무기를 장만하여 속문산성을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석우로에 힘도 한번 못쓰고 괴멸
전투서 패한 병사·백성 70∼80명
오랜 역사·문화 한순간 상실 애통
결사 항전 의지로 속문산성 모여
수십배 넘는 병력에 맞서다 최후
원혼은 구름돼 산 덮었단 전설도


“이제 얼추 다 온 셈이야.”

앞으로 얼마나 많은 지원병이 이 산성으로 올 것 같으냐는 단오의 물음에 을주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강 셈하여 80여 명쯤 될 터였다. 과연 이 병사들로 수십 배는 넘을 병력에 잘 발달된 무기, 뛰어난 전투력까지 갖춘 신라군을 맞이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단오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산 아래쪽을 전망하는 을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낯빛이 꽤나 어두웠다.

사로국(斯盧國)으로 불리던 신라가 감문국에 항복을 요구해온 것은 이달 중순경이었다. 그 이전부터 신라는 잘 준비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여러 읍락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영역을 확장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남쪽 중심부에 위치한 감문국은 금강유역은 물론 서해안과 북방으로 뻗어나가려는 야심을 품은 신라에는 반드시 복속시켜야 할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감문국이 백제와 고구려, 가야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영남내륙을 관통하여 한강 이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인 추풍령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속문산성에 잠들다

신라는 이사금의 동생이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으로 진격해왔다. 국경에 많은 병사들을 포진시킨 석우로는 감문국에 전령을 보냈다. 항복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뜻밖의 요구를 받은 감문국 조정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그동안 신라가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면서 보여준 놀라운 군사력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괜한 인명 손실만 가져올 터이니 무조건 항복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반면, 오랜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감문국의 위상을 고려해서라도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투항하는 것은 그동안 국가와 조정을 신뢰하고 따른 백성과 병사들을 배반하는 일이니 끝까지 결사항전하자는 측이 있었다.

인자한 성품을 가졌던 감문국의 왕은 병사와 백성들이 이기지도 못할 전쟁에 피해를 입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가혹할 정도로 많은 공물까지 요구하는 석우로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분노하여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 석우로의 이런 오만한 태도는 신라의 잘 조직된 군사력을 이용해 단숨에 감문국을 정벌하는 위업을 보여줌으로써 사벌국 등 주변 소국들의 항전의지를 애초부터 꺾어놓으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신라의 침공에 감문국의 병사들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괴멸상태에 빠져들었다. 종내 감문국 궁궐까지 짓쳐든 신라 병사들에게 포위된 채 감문국의 왕은 석우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감문국의 일부 병사들은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문화를 지녔던 감문국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록 전투에는 패배했지만 불굴의 용기와 항전의지, 뜨거운 애국심을 잃지 않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식수로 쓸 2개의 우물과 못까지 갖추어 방어에 용이한, 오랜 세월 감문국을 지켜온 속문산성에 집결하여 마지막 한 명까지 신라와 싸우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놓았지. 재가를 원하면 승낙해주시라고.”

집에 두고 온 형수는 어떡하느냐는 단오의 말에 을주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문득 단오는 몇 년 전부터 정을 나누던 이웃마을 처녀 보름이의 예쁘장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마 그녀도 다른 남자를 만나 잘 살아갈 것이다.

“나라가 없어져도 이곳 속문산성에 모여든 우리 민초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의지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야.”

저 멀리 산 아래쪽에서 대오를 이룬 수많은 신라 병사들이 창검을 번쩍이며 산성을 향해 진격해오는 장면을 지켜보던 을주가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오는 뜨거운 결의가 심장이 터질 듯이 모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단오는 재창이나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 우리가 죽더라도, 역사는 오래오래 남을 것이야.”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 김천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