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2016·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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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8-03-23  |  발행일 2018-03-23 제면
잔인한 현실, 한 줄기 희망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2016·영국)

때로는 영화 자체보다 그 영화를 볼 때의 에피소드가 더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일상이 조금씩 권태로워질 무렵, 혼자 예술영화전용관을 찾았다. 바쁜 일들이 겹쳐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신작을 놓칠 수 없었다. 예술영화전용관답게 관객은 대부분 혼자였는데, 영화가 끝나자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평범한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꽉 막힌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혀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 좋은 영화지만 지독하게 현실적이면서 참 잔인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묵직한 채로 시내를 한참이나 쏘다니다가 어두컴컴해져서야 집으로 왔다.

그런데 저녁에 아들과 통화를 하다보니(대학생인 아들은 학교 앞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 둘이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영화를 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도 한 줄 앞과 뒤에서 나란히 앉아 본 것이다. 더 야릇한 건 영화가 끝나고 각자 근처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는 거다. 이 사실을 안 나는 조금 난감해졌는데, 나야 그렇다쳐도 젊디젊은 청춘이 왜 혼자서 영화를 보는 건가 싶었다. 밥도 쓸쓸하게 혼자 먹고 말이다.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혼자서 예술영화를 보러온 젊은이들을 보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공대생인 아들이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해프닝부터 떠올리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이 영화는 개인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발언이다. 주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켄 로치 감독의 영화답다고 하겠다.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말하는 다니엘 블레이크는 현실의 답답한 구조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힘주어 외치는데, 그 모습이 보는 이에게 묵직한 감동을 안긴다.

성실한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실업수당을 타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생존인 것이 관공서 직원들에게는 쌓인 업무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인터넷 신청이라는 절차도 컴맹인 그에게는 넘기 힘든 산이다. 그는 자신도 어려운 처지지만 런던에서 막 이주해온 싱글맘 케이티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다. 케이티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친절 덕분에 절망의 끝에서 더 이상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니엘의 친절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그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케이티의 딸이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소원이 이뤄지기 직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남긴 채. 다니엘 블레이크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친절은 케이티와 그녀의 두 아이에게 흘러갔기 때문에 영화에는 온기가 담겨 있다. 지독한 현실에 비하면 잔인하지 않고 따뜻한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말한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나의 권리를 요구한다”고. 그가 마지막으로 써놓은 한 장의 편지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블루 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놀라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내가 무엇을 했느냐다.” 현실은 잔인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는 흔치 않은 리얼리즘 영화다. 먹먹한 감동과 함께, 나만이 아닌, ‘우리’의 삶과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다음엔 미리 약속을 하고서 청년인 아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좋은 영화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영화의 의미도, 삶도 한층 풍성해질 것이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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