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김광진의 한글 연구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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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20-04-19  |  발행일 2020-04-16 제면
의성 비안서 출생한 김광진

3·1운동 격문·신간회 활동

이극로 만남 계기 국어연구

일제 암흑기 집필한 '정음고'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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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광진(金光鎭)은 의성군 비안면 자락리(도락촌)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2014년 10월19일에 이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김광진이 태어나 자랐던 집은 '해악재'라는 재실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자락리를 방문하여 김광진에 대해 알아본 것은 그가 지은 '정음고(正音考)'라는 필사본을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문헌 자료에 대한 연구라 하더라도 관련된 현장을 조사해 보면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얻게 되고, 그 인물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다.

김광진은 고향 의성에서 한학 공부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던 중, 그의 나이 25세 되던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어버렸다. 그는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품고 대구 북성로에 세워진 우현서루를 찾아갔다. 우현서루에 소장된 신학문 서적을 열람하였고, 대구의 협성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27세에 협성학교를 졸업하고 청도의 공암학교 교사, 28세에 대구 명신학교 교사를 지냈다. 34세 되던 1919년에 3월 독립운동 당시에 격문을 써서 돌리고 거사에 참여했다. 그 후 일제 경찰에 쫓겨 의성, 문경, 울주 등으로 피해 다니다가 35세에 만주 봉천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36세에 병으로 귀국하였고, 달성군 월배학교 교장에 초빙되었다. 39세에 의사고시에 합격하여 대구 산격동에서 한의원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김광진은 의학, 병법, 양명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42세에 신간회 대구지부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자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나이 44세 되던 1929년에 한국 최초의 경제학박사(독일 베를린 대학)이자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사로 일한 이극로 박사를 대구에 모셔 귀국 환영회를 열기도 했다. 김광진과 이극로의 만남은 김광진이 국어 연구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고, 그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는 등 교류를 이어갔다.

김광진은 1940년 8월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음고에 실린 그의 서문은 1939년 11월28일에 쓴 것이다. 이 서문에서 정음에 대해 본인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생계에 골몰하여 머뭇거리다가 결실을 얻지 못했고, 이제 병들어 내 명을 재촉하니 세상에 나의 견해를 공표하지 못하고 지하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정음에 대해 생각한 바를 기록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1940년 7월20일에 병중기를 원고 안에 써넣어 마무리했다. 그리고 8월20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병중기를 쓴 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음고는 김광진의 방대한 저술 중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노작이라 하겠다.

김광진이 정음고를 저술하던 1939년과 1940년경은 일제강점기 중에도 '암흑기'에 해당하는 때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완전히 일본 영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세계 식민지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조선어 말살 및 창씨 개명 정책을 감행했다. 이 당시의 조선어 연구는 목숨을 내놓고 하는 독립운동이었다. 김광진이 조선어 어문을 연구하여 정음고라는 저술을 지은 것도 그가 참여했던 독립운동의 언어학적 변용인 셈이다. 그는 조선 국권회복단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3·1운동에 참여하여 격문을 썼으며, 만주로 피신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정음고는 조선어 연구를 통해 대한 독립과 민족정신 회복에 기여하려는 김광진의 실천적 성과물인 것이다. (김광진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최재목 교수와 박지현 박사의 논문을 이용하였음을 밝혀둔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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