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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
예천 지보에 가면 용암지라는 큰 연못이 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저수지다. 그러나 이 연못에 적지 않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못 둑에 자리 잡은 '용암지기념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용암지, 곧 도화리 저수지는 장혁주의 소설 '아귀도(餓鬼道)'의 배경이 되었다. 장혁주는 대구 출신 작가로 '아귀도'가 일본 '개조' 현상소설 2등에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육사는 '아귀도'가 실린 "개조 잡지가 각 서점에서 짐을 풀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하고 나는 듯이 팔려 그 다음날부터 절품"이 되었다고 했다.
장혁주는 1926년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1927년 예천군 지보면립보통학교 대용교원으로 취업하면서 예천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예천 지역에 가뭄이 덮쳐 농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했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928년 70년래 대한재(大旱災)가 발생하였으며, 예천 지보면 일대에 가뭄이 혹심하였는데, 쌀 수확이 8~9할 감소했다고 한다.
"혹심한 한발이 남선(南鮮) 지방을 덮쳐 논이나 밭에는 대작으로 조를 갈았으나 그것마저 잘 익질 않았다. 가을에 거둔 조나 콩은 지주들에게 뺏기니, 농민들은 하는 수 없이 무나 배추, 고춧잎이나 콩잎 말린 것을 양식으로 했다. 그것마저 모자라기 일쑤여서 들판인 언덕을 뒤져 풀뿌리를 캐어왔다."
장혁주는 농민들의 참상을 보고 '아귀도'를 썼다. 그는 농민들이 가뭄 피해로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로 연명한다고 했다. 한발로 인해 뒤늦게 조를 갈았지만 제대로 익지 않았고, 그것마저 지주에게 빼앗겨 무순이나 배추, 고춧잎을 말려 양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에도 1929년 춘궁기에 예천 지방 사람들이 초근목피도 마음대로 얻을 수 없어 굶주리다 못해 부증(浮症) 난 집이 200여호가 되고, 아사와 이산 표랑하는 사람이 속출하였으며, 1929년 4월에는 예천 일군에서 한해 이재민이 육천명이 되었다고 했다.
"공사는 지보면의 한해 이재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보면은 삼년 동안의 한발로 아사자가 가장 많았고, 경상북도 중에서 그 피해가 가장 심한 지방이었다."
이런 가운데 용암지 건설이 한해 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면내의 농민 700명이 모여든다. 그런데 정작 농민들을 위한다고 하는 저수지 공사에서 농민들은 임금을 착취당하고, 십장들의 횡포와 감독의 부정이 만연하여 결국 감독과 지주들의 배를 불리는 공사가 된다. 조금이라도 일이 더뎌지면 채찍이 날아들고, 대들면 어김없이 집단 린치를 당하거나 주재소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농민들은 윤 동지를 통해서 그러한 현실을 자각하며 부정과 불의에 맞선다.
"마산이는 감독의 팔을 잡고 밀쳤다. 군중은 저마다 욕을 하면서 뒤따라갔다. 감독을 둘러싼 행렬은 산을 넘고 고개를 내려××××××××××××. 끝 1931.10."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감독에 의해 잡혀간 윤 동지를 구출하러 함께 나선다. 결말 부분에서 리얼리즘 문학의 중요한 가치인 전망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검열로 인해 복자 처리된 글자(×)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 말고도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구절들은 일제에 의해 모두 지워졌다. 이로 인해 장혁주는 원래 의도했던 조선 사람의 생활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귀도'는 황폐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하는 민중들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리얼리즘의 수작이다.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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