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박광선이 쓴 생활 기록 '보덕공 비망록'

  • 이은경
  • |
  • 입력   |  수정 2020-06-25  |  발행일 2020-06-25 제면
일상의 주요사건 적혔지만

메밀김치, 붕어증법, 닭채…

한글로 쓴 음식조리법 눈길

옛기록 속에 오늘의 길 있어

고령 전통음식 되살려 보자

2020062401000852000035011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북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는 아주 잘 생기고 예쁜 마을이다. 나지막한 청룡산 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모듬내의 맑은 물이 그 앞을 흐른다. 소고 박광선(1562~1631)은 이 마을 출신이다. 1618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1622년에는 세자를 가르치던 보덕에 임명되었으나 인조반정에 연루되어 비운을 겪은 인물이다. 지금은 그의 후손 박돈헌 선생이 도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문중의 고문헌을 보존해 오면서 선조 박광선이 친필로 쓴 글의 가치를 알아본 박돈헌 선생은 이 책의 영인본을 만들어 배포했다. 본문 첫머리에 '吾行錄(오행록)'이란 이름이 있고, 끝 장에는 '家傳規範(가전규범)'이란 이름이 있으나, 내용으로 보면 박돈헌이 이름 붙인 '보덕공 비망록'이 잘 어울린다.

한글과 한문으로 쓴 이 책에는 박광선이 일상생활에서 겪은 주요 사건이 적혀 있고, 음식조리법·병 치료법·약방문 등 다양한 생활 정보가 담겨있다. 일례로 한문으로 쓴 문장 중에는 을사년(1605년) 정월 23일에 한강 정구가 이 마을에 와서 학암정에 석물 설치를 감독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경신년(1620) 5월 유시에 한강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도 있다. 한강 선생과의 교류에 대해 중요 골자를 적어둔 것이다.

다양한 기록 가운데서도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단연 한글로 쓴 각종 방문이다. 한글로 쓴 음식조리법 몇 가지를 소개하고 그 가치를 찾아본다. 메밀을 팔월에 파종하여 어린싹을 베어 김치를 담그면 가장 맛이 좋다는 메밀김치법이 이 문헌에 나온다. 메밀김치는 다른 음식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음식이다. 이 방문에 '김치'란 낱말이 처음 나온다. '딤치'나 '짐치'는 여러 문헌에 많이 나오지만 '김치'는 이 문헌에 나온 것이 가장 빠르다.

붕어를 잡아 배를 가르고 후추, 조피, 간장 등의 양념을 넣고 실끈으로 감아 구워 먹는 '붕어증법'이 기록되어 있다. 도진리 앞에 강물이 흐르니 붕어는 흔한 것이었고, 붕어찜은 일상 음식이었을 것이다. '닭채'는 암탉의 속에 온갖 양념을 넣어 솥에 삶아내어 썰어서 초간장에 찍어 먹는 음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닭채' 역시 다른 음식서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만두 만드는 방법은 '좌랑댁'이 잘 안다고만 하고 조리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어만두를 만들려면 좌랑댁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정월 첫돼지날(亥日)에 시작하여 세 번의 해일을 거쳐 빚는 삼해주방문은 다른 음식서의 것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찹쌀감주는 찹쌀 한 말로 밥을 지어 가루누룩 반 되와 술 반 병을 넣어서 만든다. 누룩과 술이 들어가는 점이 특이하다.

한문으로 쓴 소합주 방문이 흥미를 끈다. 소합환 열 알을 가루 내어 맑은 술을 부어 밀봉하여 따뜻한 곳에 두었다가 7일 후에 꺼내어 한 잔씩 마시는 술이라 했다. 이 술의 효능은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늘어진 위를 다스리며, 치솟은 기운을 내리고 풍과 습기를 없애어 몸을 가볍고 안색을 밝게 한다고 했다. 성주에 와 귀양살이하다가, 고령군 운수에 묻혔던 이문건(1494~1567)은 '묵재일기'에서 소합주를 마셨다고 적어 놓았다. "아침에 소합주를 먹으니 두 손이 따뜻해졌다"라고 그 효능까지 써놓았다. 소합환의 제조법은 한의학서에 나오고, 청주 빚는 법은 도진 마을의 할머니들이 알고 계신다. 그러니 소합주를 도진 마을의 특산 향토주로 재탄생 시킬 수도 있겠다. 보덕공 비망록을 활용하여 고령의 전통 음식문화를 되살려내어 보자. 옛 기록 속에 오늘을 위한 길이 있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