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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민속화에 나타난 신행 장면. |
'혼인은 인륜대사'라 하여 옛날부터 사람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사연 많고 눈물 많은 인간사가 혼사였다. 자유혼이 아닌 중매혼으로 배우자를 선택했던 옛사람의 혼인에는 혼반이라는 집안의 격이 혼사를 좌우했다. 그 인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결혼은 집안끼리 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왕이면 뼈대가 있는 집안을 찾기도 한다.
◆ 복잡다단 집안사
영남양반 집안은 배우자 선택시 반드시 가문을 따져보고 결정했다. 따지는 가문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고 조강희박사의 유작 '영남 양반가문의 혼인관계'에 그 실체가 잘 드러나 있다. 퇴계종손 6대 150년간 친가 외·처가의 통혼사례 250건을 추출하여 10년에 걸쳐 일일이 찾아다니며 실태를 분석한 역작이다. 250건 혼인은 99개 집안 간 이루어졌고 그중 3회 이상 혼인이 이루어진 집안수는 30개, 2회 혼인 집안수는 20개, 1회 혼인 집안수는 49개였다.
경상도 재지사족의 유력집안은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3회 이상 혼인이 이루어진 30개 집안을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동 6개, 봉화 4개, 경주 3개, 영주 3개, 상주 2개, 영양 2개, 성주 2개, 달성 2개, 김천 1개, 영덕 1개, 칠곡 1개, 문경 1개, 밀양 1개로 당시 교통과 숙박여건이 열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혼인망은 경상도 전 지역에 걸쳐 그물망처럼 넓게 퍼져있었다.
퇴계종손 150년 통혼 250건
재지사족 등 99개 집안과 혼인
3회 이상 연 맺은 가문 30개
격 비슷하고 중첩 혼인관계
양반문중 지체 '혼반' 일컬어
조상·학문·관직·재산順으로
혼인으로 인연을 맺는 것을 '세교(世交)'라 하며 한번 맺은 인연은 대를 이었고 세교가 두터운 집안은 혈육처럼 가까웠다. 이처럼 격이 비슷하면서 중첩적인 혼인관계가 이루어진 양반문중의 지체를 '혼반(婚班)'이라 한다.
지체가 높은 문중은 그들끼리, 그 다음의 격을 가진 문중은 또 그들대로, 겨우 양반말석에 이름을 올린 집안도 그 나름대로 혼인망을 형성했다. 한번 맺은 세교는 끊어지지 않게 소중히 여겼다.
상주의 지체 높은 문중 딸이 달성의 명문가로 출가하였으나 신행도 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양가 집안에서는 자칫하다간 오랜 친구인 혼주끼리 우정에 금이 가고 세교가 끊어질지 모르니 한 번 더 사돈을 맺어야 한다고 해서 그 동생들을 다시 결혼시켜 인연을 이어갔다.
혼반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는 조상·학문·관직·재산의 순이었다.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가문에 '현조(顯祖·훌륭한 조상)'가 없으면 상위 그룹 혼반에 들어갈 수 없었다. 문중의 문집발간 인물수는 가문 위상의 척도였다. 중매쟁이는 항상 저울을 가지고 다니며 저울추가 기울지 않아야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후기 향촌의 지배질서가 재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한 집안과 경제적으로 새로이 성장한 신향(新鄕)집단에서 전통의 구향 집안과 혼사 맺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길혼과 연줄혼
혼반이 비슷한 집안이라도 왠지 '잘 되는 집안'과 '잘 안 되는 집안'이 있다고 했다. 잘 되는 집안과 인연을 맺으면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고 자식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글을 잘 지어 가문에 영광을 가져온다'하여 이를 '길혼(吉婚)'이라 했다. 길혼 집안과 혼인은 재미가 좋아 혼사이야기가 나오면 먼저 그 집안을 찾게 되고 누대에 걸쳐 통혼이 이루어졌다. 영남양반문중 대부분은 서너 개의 길혼 집안을 가지고 있었다.
길혼에도 들어오는 사람이 잘 되는 경우와 나가는 사람이 잘 되는 경우가 있다. 며느리로 맞이하는 혼인과 딸자식을 내보내는 혼인인데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중 통혼의 속설로 이를 선호했다.
연줄혼은 양가 집안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인척이 중매하여 이루어지는 혼인인데 주로 먼저 결혼한 여성이 친가와 시가의 혼인 적령자를 연결하여 성혼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양가를 잘 알고 있으니 실패할 위험이 적고 본인이 실제 사례가 되니 양반가 혼인에서 자주 일어났다.
양반가에 길혼과 연줄혼이 반복되니 다양한 모습의 혼인이 생겼다. 시댁 질녀가 친정 동생댁이 되거나 처사촌이 매부가 되는 등 누이바꿈이 되거나 아버지 사돈이 내 사돈이 되기도 했다. 또 서너 문중이 한 방향으로 혼인관계가 연속적으로 성립되어 '물레혼'이 일어나고 친가의 같은 항렬이 시가에서 숙모뻘이 되어 서열 혼란도 생겼다. 동성불혼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중첩적인 혼인으로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란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가문의 위세
'평민의 인연은 가까운데 있고 양반의 인연은 먼데 있다'는 이야기와 '양반혼인 칠백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가문의 위세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미치면 먼거리 혼사도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좌·우도로 나뉘던 경상도가 임란전후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면서 상도와 하도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 결과 오늘날 경남·북이 되었다. 하도 사람들은 '웃녘혼인을 해야 진짜 양반이 된다'고 하여 상도혼을 선호하고 상도 사람들은 '아래쪽과 풍습이 다르다'라는 이유로 하도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봉화 양반집안과 사돈을 맺은 함양 양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좌·상도 쪽 혼인을 한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함양·거창·산청 지역의 웬만한 문중들과 혼인을 수없이 하였지만 안동·봉화 쪽과 사돈을 맺어야 옳은 양반이 된다는 선친 소원을 이제야 풀었다.'
양가 잘 알고 있는 인척 중매
실패 위험 적은 '연줄혼' 선호
동성불혼 교묘하게 피해가며
서너 문중 연속 성립 '물레혼'
신랑이 신부집 와 혼례 치르고
신랑집안 사람들 하룻밤 유숙
신랑은 사나흘 머물다 본가로
1년 지나면 신부가 신랑집 와
본격적으로 '결혼 생활' 시작
겉으로는 풍습이나 속설로 핑계되지만 무신란으로 큰 타격을 입은 하도 사람들이 당시 남아있던 상도 큰 양반에 대한 막연한 선망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250건 혼인 중 12건이 상·하도혼이었다.
영남문중은 '갯가는 재미가 없다'하여 해안고을 집안과 혼인은 가급적 피했다. 그런데 영덕·영해 고을은 예외였다. 고려말 대학자 한산이씨 이색이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고 반가 역사가 천년에 이르러 재령이씨, 영양남씨, 무안박씨 등 명문가가 많아 '소안동'이라 했다. 예안 할배는 이렇게 말했다. '안동사람들은 닭 한마리 잡으면 온 고을이 나누어 먹는다는 말이 있다. 골이 좁아 생산은 적은데 쓰일 데는 많아 생활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셋째 여식 혼사이야기가 나왔을 때 여러 군데 자리가 났지만 영해 집안으로 정했다. 조상님 제삿날에 어물 걱정은 덜 수 있을까 했다. 실제로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평소 구경도 못하던 귀한 어물들을 짝으로 보내왔다.'
◆가문 혼사의 이면
양반사회에서 배우자가 사망하면 남자는 가계를 이어야 할 책임감과 집안을 번성시켜야 할 의무감 때문에 바로 재혼했다. 자식이 많아야 가문이 융성해지므로 재·삼혼은 흔한 일이었다. 당시 열악한 의료시설로 출산으로 인한 여성 사망률이 무척 높았다.
반가 여성은 남편이 사망하면 평생 수절(守節)해야만 했다. 정려를 내리고 열녀문을 세워 수절을 강요했고 수절하지 않고 후살이나 첩이 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다. 가난한 양반은 딸을 팔아 혼사를 치루었고 사돈댁은 처가 덕에 양반급수가 올라가 '치마양반'이라 했다.
처녀 딸을 잘사는 집 후처로 출가시키는 재·삼혼에는 그만큼의 희생이 뒤따랐다. 후처의 경우 택호도 죽은 전처의 것을 사용해야 했고 자기가 낳은 자녀들도 전처의 친가를 외가로 불러야 했다. 이를 '그림자 새댁'이라 했다. 없는 것이 죄이지 전처소생까지 다 키우고 이름마저 없는데 누가 어린 딸을 재취로 보내고 싶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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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가마 앞에 앉은 신부의 모습. 양반가 신행 행렬은 대단한 볼거리였다. 곱게 단장한 계집종 둘이 앞에 서고 말 일곱 필과 열명 넘은 종자(從者)가 우쭐거리고 꽃가마 옆에는 신비(新婢)가 조잘거렸다. |
◆조선여인의 신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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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이 탔던 꽃가마. |
조선시대 혼례는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혼례를 치루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하룻밤 유숙한 뒤 돌아가고 신랑 역시 사나흘 머물다가 본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대략 1년이 지난 후 신부가 신랑집으로 신행하면서 비로소 정식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신부집에서는 혼례일보다 1년 뒤의 신행 때가 더 부담스러웠다.
선산 무반양반 안강노씨 집안에서 풍산 하회류씨 집안으로 신행하는 모습을 68년간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노상추(1748~1829)가 기록으로 남겼다. 노상추 집안은 조손이 당상관에 올랐고 그는 정조 승하 당시 금위영 천총(정3품·국왕호위부대장)직에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정조를 모셨다. 노상추 일기이다.
'일찍 신행하려고 아침 식전에 유복이 가마 끄는 말 1필을 몰고 도착했다. 가마·휘장·등롱은 해평 최진사댁에서 빌렸다. 말은 7필이고 하인이 10명, 신부 가마 앞에 서는 여자종 2명…. 아버지가 친히 가셨다. 누이를 송별하기 위해 일가친척이 여럿 오셨다. 신행하고 닷새 만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별 탈 없이 끝났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스럽다.'(1768년 10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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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 신행 행렬은 대단한 볼거리였다. 곱게 단장한 계집종 둘이 앞에 서고 말 일곱 필과 열명 넘은 종자(從者)가 우쭐거리고 꽃가마 옆에는 신비(新婢)가 조잘거렸다. 선산~하회, 백오십리 신행길이었다. 이렇게 신행한 노상추 누이는 5년 만에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그녀는 여느 반가 며느리와 같이 재혼하지 않고 몇 년에 한번씩 친정 들리는 것 외에 평생 시댁 하회를 떠나지 않았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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