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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전국을 호령했던 대구지역 건설사 '빅3' 청구(가운데)·우방(오른쪽)·보성의 본사 사옥. 〈영남일보 DB〉 |
청구
1980년대 개발붐 시기 대구에 고층아파트 선보여 주목
신도시 사업서 도약…유통·방송등 무리한 확장에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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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4일 청구가족한마음대회에서 장수홍(가운데) 회장이 직원들에게 생맥주를 따라주고 있다. 〈영남일보 DB〉 |
청구그룹은 1973년 청구주택개발<주>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태동 초기에는 자본금 2천만원으로 대구 동구 범어동(현 수성구 범어동)에서 단독주택을 건설·판매하는 소규모 주택사업을 영위했다. 창업주인 장수홍 전 청구그룹 회장은 대구사범학교와 부산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건축잡지를 보던 중에 주택사업에 관심을 두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1980년대 개발붐을 제대로 탔다. 경북 대구시가 1981년 7월1일 대구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구지역 곳곳에서 개발붐이 일기 시작했다. 청구는 고층아파트를 설립해 대구시민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과 수도권 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1989년 수도권 신도시 사업이 터지면서 도약의 전기를 맞았다. 청구는 신도시 사업으로 주택업계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자 그룹을 형성했으며 사업계획 방향을 '탈주택 계획'으로 전환, 블루힐백화점, 대구방송·파라비전 등 방송, 유통, 금융, 관광, 정보통신, 레저로 급속히 사업을 확장했다. 청구그룹은 1997년 말 계열사 14개, 재계 그룹 순위 35위의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청구그룹은 금리, 중도금 납부기일 등의 조건이 불리한 속에서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이미 IMF 외환위기가 오기 1~2년 전에 증권가와 경제계에서 부도설이 나돌았다. 신규 자금 마련을 위해 분양 가능성을 무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아파트 건설을 강행하는 바람에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 말 미분양 아파트가 1천626가구에 이르렀다. 여기에만 묶인 자금이 2천억원에 이르렀으며 그룹 총부채는 총매출에 맞먹는 1조700억원이었다. 업계에는 그동안 청구가 이른바 'TK정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으며 당시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결국 1997년 12월 청구그룹은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청구그룹이 좌초한 직접적인 원인은 IMF 한파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구그룹은 금융기관의 자구책 여파로 여신이 동결된 데다 기존 여신의 상환압력, 회사채 재발급 불능 등으로 1997년부터 극심한 자금난을 겪어왔으며 IMF 구제금융 이후로는 일반금리가 20%, 단기금리가 40%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시중금리가 아파트 중도금 연체 이자율보다 더 높아지자 아파트 분양계약자들이 대거 중도금 납입을 포기, 자금 유입이 사실상 중단됐다. 아파트로 닦은 주부들 사이의 명성을 유통에 끌어들인다는 전략 아래 1996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2천억원을 투자, 블루힐백화점을 개점했으나 서울 강남으로 향하는 고급 소비자들 흡수에 실패, 투자 자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장 전 회장은 청구 경영진 비리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2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우리나라 경제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하는 진기록을 만들었다. 장 전 회장은 출소 이후에는 특별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으며 대구경북지역과도 인연을 끊었다.
우방
3베이평면·지상녹지·호텔식로비 '아파트 설계 표준화'
회장이 망치들고 하자 점검…튼튼하고 살기 좋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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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살리기시민운동본부(본부장 김규제)가 2001년 6월14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우방살리기 시민서명운동의 목표달성을 알리는 선포식을 가지고 있다. 〈영남일보 DB〉 |
1939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故) 이순목 이사장은 1978년 <주>우방주택을 창립해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우방주택의 첫 사업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지은 16가구의 단독주택이었다. 이후 1980년 '동부 우방아파트' 30가구를 시작으로 아파트 사업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몸집을 키웠다. 1981년부터는 지방건설사로는 드물게 대단지 아파트를 시공했다. 1980년대 말부터 수도권을 중심으로 신도시 건설 붐이 불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우방은 이 바람을 타고 수도권 및 전국으로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대구지역 주택 보급 실적 1위를 달성했으며 1989년에는 전국에서 2위의 실적을 거두었다. IMF 직전인 1997년에는 유수의 대기업 건설사를 누르고 상반기 순이익 1위를 기록했다.
이 회장은 건설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부실한 부분을 망치로 깨부순 것으로 유명하다. '망치 회장'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이 같은 행동 때문이다. 망치로 부순 뒤에는 "내가 살 집이라 생각하고 지어 달라"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 같은 일화가 현장에 전파되면서 전국적으로 '우방이 지은 집은 튼튼하고 살기 좋다'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순이익 1위를 기록한 1997년에는 당시 주택공사가 실시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우방은 1990년대 국내 최고의 아파트 건설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파트 기본 디자인인 3베이 평면설계와 지상에 녹지를 조성하는 구조는 모두 우방이 국내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를 시도했던 구조와 설계다. 최근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중심으로 적용되는 호텔식 아파트 현관과 로비도 우방의 작품이다.
제도에 있어서도 우방은 남달랐다. 우방은 국내 최초로 중도금 무이자 대출 제도를 도입한 기업이다. 당시 은행 이자가 두 자릿수였음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처럼 혁신적인 설계와 분양 제도를 갖춘 우방은 상승세를 타고 재계 순위 30위까지 성장했다. 1995년 3월28일에는 대구의 랜드마크가 된 우방타워(현 83타워·사진)와 인근 테마파크인 우방타워랜드(현 이월드)를 개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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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도 10년간 재직했던 이 회장은 우방그룹을 경영하면서도 1991년 정화교육재단(정화중·여고)과 1992년 구미교육재단(구미대)을 설립하는 등 교육자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5년부터 전성기를 맞은 우방은 우방랜드 등 10여 개의 산하 기업을 두었으며 브랜드 가치가 1조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방은 2000년 IMF 구제금융 시절 발생한 자금난과 부동산 시장 위축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우방그룹은 워크아웃을 거쳐 2000년 최종 부도 처리됐다. 창업자인 이 회장은 2012년 8월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보성
1986년도에 층간소음 예방 위한 바닥방음시스템 개발
수도권·해외 진출…90년대 4년 연속 '주택보급률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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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직후 봉사대를 조직한 보성그룹 직원들이 1996년 10월31일 복구반원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
창업주인 고(故)김상구 보성그룹 회장은 1936년 성주에서 태어나 대구상업중학교와 성주농고를 거쳐 1959년 경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대구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다 1974년 주택건설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 대구시 북구 산격동에 보성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아파트 사업에 진출한 보성은 1986년 보성상아맨션에 업계 최초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지하 주차장을 설치했으며 층간 소음 해결을 위한 바닥 방음 시스템을 개발했다. 1990년 월성보성타운 1천700세대를 비롯한 총 3천여 세대 공급을 시작으로 1995년까지 매년 3천여 세대의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지역 업체로 4년 연속 주택보급률 1위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서울지사 설립으로 수도권에 진출해 서울, 일산, 분당, 수원 권선 지구 등에 총 3천여 세대의 아파트를 공급하고 1995년 서울·수도권 아파트 입주민 대상 주거 만족도 조사에서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해외 진출의 일환으로 1994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지사 설립,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사 설립을 통한 미주 지역 주택 사업 시행, 1995년 사이판 대형 콘도 신축 공사 수주 등의 실적을 올렸다.
주택 공급 외에 관광·레저·스포츠·언론 등 사업 다각화를 시도, 1995년에는 대구일보를 인수했으며 칠곡 왜관에 총 36홀의 매머드급 경북컨트리클럽을 운영했다. 1996년에는 총 7천800세대의 주택을 공급, 매출 1조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며 회사를 재계 40위의 그룹으로 육성했다.
김 회장은 고향인 경북 성주의 15만평에 육우 1천두 규모의 목장을 조성해 운영하면서 경북대 수의과대학과 산학 협동으로 육질 개선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1992년 5월에는 성주군 성밖 숲 공원 조성 사업 기념으로 성문회관(2층 콘크리트 철골 건물)을 건립해 성주군에 기증했으며 가야산국립공원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성주군 수륜면 백운교(1·2·3교)를 건설하는 등 향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햇다.
일취월장하던 보성그룹도 IMF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보성그룹의 주력사인 <주>보성과 보성건설이 1998년 1월12일 부도 처리되면서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같은해 11월 이후 체납된 중도금이 1천600억원에 이른 데다 만기도래한 기업어음(CP)도 연장되지 않아 극도의 자금난에 시달렸다. 김 회장은 2003년 2월6일 서울에서 신병 치료 중 타계했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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