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가을도 배송됩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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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20   |  발행일 2021-08-20 제35면   |  수정 2021-08-20 08:41
가을하늘
열대야가 이슥한 밤 자리로 접어들 무렵, 그 가장자리에 귀뚜라미 울음이 서성거린다. 저절로 뱃가죽 위를 덮는 얇은 이불. 한때는 그렇게 밀어냈는데 이젠 내 곁으로 끌고 온다니. 변덕, 그게 인간의 최강 덕목아닌가.

일진광풍으로 내달리던 저 하절기의 열기, 전국 에어컨을 다 가동해도 열기 앞에선 조족지혈. 그런데 며칠 만에 그 열기 속을 바늘처럼 파고드는 냉기(冷氣). 도대체 그것의 발송자는 누구인가? 아마존과 배달의 민족이 옮겨준 걸까? '계절도 무한리필되고 배송됩니까'.

신호탄처럼 번지는 어떤 써늘함. 그건 겨울의 추위와 물성이 다른 것이다. 생명의 관성, 그자가 제 호흡의 끝을 더 길게 연장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저 허공은 마구 달려왔던 저 활활 타던 기세를 어느 날부터 북북서로 회항하기 시작한 것인가. 항공모함의 선미 자락에 매달린 U자로 굽어진 수적처럼.

녹색 기운이 꽝광 했던 저 숲들. 이제 더 이상 초록의 에너지를 생산하지 않을 모양이다. 베어내자마자 부리나케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하던 지난 여름날 저 무시무시한 잡초들. 제 무성지기(茂盛之氣)를 칼집에 꽂고 있다.

허공이 하나의 시선이라면? 그게 하늘의 기운과 기세 사이에 연골처럼 박혀 있다. 기운은 거짓말을 못 하지만 기세는 거짓의 포스를 연출한다. 선풍기와 에어컨은 모두 기세의 연장이다. 하지만 여름의 몸에 가을을 주입시키는 선선한 바람은 바로 진짜 가을의 기운인 것이다.

정상을 밟고 하산하고 있는 자의 눈빛,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 정상을 향하는 자들의 눈빛, 같은 눈빛이건만 지옥과 천국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이미 출세한 자의 가슴과 출세를 향해 달리는 자의 가슴. 그걸 '인권'이란 이름으로 동일시(포장)한다면. 챙겨야 하고 배려해야 될 걸 놓치게 된다. 자연과 자연인을 동일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안목이다.

초월·해탈 같은 게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없는 자에겐 '주문(呪文)', 있는 자에겐 '주술(呪術)'이 될 것이다. '열심히 살아'란 말과 '견뎌'란 말 중 당신은 어느 게 더 맘에 드는가. 된 자의 기쁨과 올인해도 되지 못한 자의 슬픔. 그걸 '희망 모드'로 최면 걸면 곤란하다. 가끔 전국의 사찰·성당·교회에 있는 성직자를 다 집으로 돌려 보내고 그 공간을 신혼부부의 공공주택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성직자는 설교와 법문 대신 커피나 대접하는 바리스타로 전직시키고. 그럼 지구가 당장 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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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산하의 이파리. 그 복판으로 조락(凋落)의 기운이 진군하고 있다. 중년의 머리카락에 섞여드는 새치처럼 번진다. 한숨과 맞물린 헛기침, 웅변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깝다. 스잔함도 아니고 애잔함도 아닌 우수의 정조가 입추를 스쳐 지나갔다. 십 리 이상 치솟든 뭉게구름도 수평으로 눕고 있다. 입춘지경은 다짐이지만 입추지경은 고백인 것 같다.

내년부터 전국 부동산 완전 허가제. 충격, 아파트 가격 50분의 1로 폭락. 전국 부동산 중개업소 동시 폐업. 남아 도는 아파트에 노숙자 입주 이어져…. 그런 구운몽 같은 상상을 해보는 가을 커피 즈음, 동대구역 입구에 달린 CCTV 너머 2021년 햇가을 하늘을 행찍 해봤다.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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