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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
가을볕이 내리쬐는 어느 오후의 기억. 기억 속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 저편에서 인사를 건네는 반가운 얼굴과 마주한다.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뵙던 날의 풍경이다. 여러 차례 선생님 댁을 방문하며 최인훈 문학의 틈새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던 나는 그날 선생님께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가을이면 최인훈 선생님이 더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최인훈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자기 서사를 담은 소설 '화두'를 읽어야 한다. '화두'는 소설을 절필한 지 2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로서, 인생의 화두를 풀어가는 소설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각자의 방법이 있지만, 최인훈에게 그것은 "가장 손에 익은 방법-'문학'이라는 돛대에 자기 몸을 묶는 일"이었다. 이처럼 자기 삶을 소설의 방식으로 재현한 '화두'는 자신이 읽고 썼던 다양한 텍스트를 매개로 메타픽션, 즉 소설 쓰기 과정을 소설로써 풀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화두'에는 작가가 읽고 쓴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텍스트들이 거대한 그물망처럼 엮여 있는데, 이러한 텍스트들의 기원은 그가 즐거이 출입했던 도서관에 있다.
도서관에서 나는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고 있었다. 도서관은 큰 책이다. 너무 커서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한 곳에 놓아두고 있는 큰 책이다. 도서관 지붕은 책의 등이고 도서관 벽은 책의 겉장이고 도서관 문은 이 책의 안표지고, 목록은 이 책의 목차다. 이 집은 아기집(胎)이다. 이 속에서 사람은 사람이 된다. (화두 중에서) 화자는 도서관을 '아기집'으로 비유하며 자신의 정체성 형성에 도서관이 주요했음을 밝히고 있다. 책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그는 조명희의 '낙동강'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과정에서 "'현실'과 '책읽기'와 '글쓰기' 사이를 잇는 실핏줄"이 생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주인공의 사랑에서 친구의 사촌누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집을 떠나는 로사의 뒷모습에서 자기 가족의 모습을 발견하는 화자는 그것을 글로 썼고,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신진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후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그의 궤적들은 도서관을 기원으로 한 읽기와 쓰기의 연동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단순히 읽는 행위에만 머무른다면 도서관에서 무엇인가로 태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책 속의 세계에서 지금-여기의 삶을 읽어내고 그 과정에서 보다 나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때야만 가능하다. '화두'에서의 '현실과 책 읽기와 글쓰기의 연동'은 그래서 중요하다. 책을 읽으며 자기와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만, 추상적일 수 있는 앎을 구체화하는 것이 글쓰기다. 이처럼 읽고 쓰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삶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요즘 도서관은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하며 읽기와 쓰기의 연계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2건의 출판기념회(경주시립도서관, 대구안심도서관)는 '꿈꾸는 아기집'으로서 도서관의 역할과 위상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12주 동안 진행된 '도서관 지혜학교'를 통해 각자의 자서전을 출간한 선생님들은 이제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고,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지역민들이 자신의 삶터를 탐구하여 한 권의 멋진 책으로 출간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들의 공통점은 도서관에서 꿈을 꾸며 역동적인 삶의 주체로 거듭났다는 점이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이를 잊고 새로운 도전을 씩씩하게 펼쳐가는 그분들께 존경과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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