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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돌리노 성지의 성모님(테라코타.1993년 개작. 38x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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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최태화. |
최태화(崔台化)는 조각가다. 70대 중반의 여류 작가다. 최근에는 작업에 힘이 부대끼는지 쉬는 날이 많다. 쉰다기보다 걸어온 여정을 더듬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무언가가 떠오르면 떠오른 그것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고, 정리하느라 되레 쉴 틈이 없다.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그녀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에서 "과거의 기억이 너에게 기쁨을 줄 때만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최태화는 겉으로는 짜증스러운 매사라지만 실은 요즘 늘 기쁘다. 넉넉하게 쌓인 즐겁고 '기쁜 과거' 때문이다. 성모상을 비롯해 힘들게 했었던 작품들을 보면 거기에는 묘한 희열이 무더기로 묻어 있다. 유일하게 기쁨을 주는 '과거'들이다.
흙을 채우지 않고 비워냄으로써 부피 표현
비어있는 양괴·역공간적 표현 작업 파격적
작품 원형은 흙을 빚는 '테라코타' 기법 고수
이탈리아 등 지구촌 곳곳 찾아 다니며 예술행보
종교·영적·관념적 세계관 조형언어로 표현
8년간 작품세계 집대성한 3권의 선집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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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얼굴(1978. 25x20x40㎝.) |
◆세 권의 선집
작가들의 과거는 그 작가의 화집이나 전시회 팸플릿 혹은 영상물에다 보도자료와 논문집 등이 주류를 이룬다. 최태화도 비슷하다. 2011년부터 8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세 권의 '선집'을 펴냈다. 조각가로서의 자신을 집대성해 본 것이다. 왕성한 시절의 기록물에다 화집과 평론집, 여기다 학문적이고 논문집 같은 성격이 가미돼 깐깐하기가 이를 데 없다. 네 번째 선집 발간도 고려 중이다.
'작품선집 1'의 제목이 '네거티브의 새로운 공간'이다. '작품선집 2'도 '네거티브, 새로운 차원의 탄생'이다. 두 권 모두 제목에 '네거티브'라는 단어가 쓰였다. 좀 무겁긴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들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담겨 있지도 않다. 최근의 세 번째 선집 제목에도 '네거티브의 결정체'라며 역시 '네거티브'를 달았다. 다만 세 번째 선집에는 '영성미술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당연히 종교적인 이미지가 함축된 작품들이 주류다. 작가도 여기에 대해 "지금까지 작업해 온 종교적 모티브의 작품들을 모아 신앙고백서 같이 엮은 것"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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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 속의 천사(브론즈.1996. 28x25x60㎝ 복사본) |
◆네거티브
그렇다면 '네거티브'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최태화는 "작품선집의 제목에서 말하는 '네거티브'는 긍정에 반하는 부정(否定)의 뜻이라기보다는 부정(不定), 즉 영어의 'infinitive'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직은 시원치가 못하다. 그의 예술세계를 늘 주목해왔던 목포가톨릭대 노성기 총장(신부)은 "조각에서 네거티브 기법은 그동안 전통적인 포지티브 기법이 보여주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다. 이는 조각 분야의 인식과 지평을 넓혀주고 고양 시켜 주었으며 창의적이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작가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이 과감하게 조각계에 던진 창조적 아이디어는 '네거티브 기법'. 양괴(양감·mass)를 다루면서 흙을 예로 들자면 흙을 빚을 때 종전의 방법, 즉 묘사하는 대상의 형체를 흙이 꽉 찬 볼륨으로 빚지만 네거티브 기법은 거꾸로 역(逆)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속을 확 파내는 기법이다. 속이 다 시원하고 솔직한 기법. 음각이라고나 할까. 조각에서 거꾸로 속을 파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엄청난 위험과 모험이 따른다. 이를 보고 많은 조각가들은 최태화는 끝났다며 혹평에다 걱정까지 더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오기로 가득 찬 대담한 그의 네거티브 기법은 파격적이며 국내외적으로 현대조각 예술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줬다고 호평했다. 최승훈 전 대구미술관장도 꽉 찬 양괴에 비해 "네거티브 이것은 파내버리니까 비어있는 양괴"라며 '역공간(逆空間)'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태화의 역공간적 형체표현 작업은 역시각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며 긍정의 신호탄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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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오의 여인(1983년작. 35x35x80㎝. 국제콩쿠르 조각 1등 수상) |
◆파냄
지난 50년대 중반 국립박물관이 죽은 자가 편안히 영면하도록 베개와 등침을 알맞게 파 놓은 6세기경 신라시대의 잠자리로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돌로 판 요다. 보통은 커다란 판석에 머리 베개와 발 베개를 놓고 그 가운데 시상을 안치하는 게 상례다. 그러나 이 돌 요는 머리 베개와 발 베개를 함께 파 푹신한 요를 만들었다. 6개의 무른 응회석 덩이다. 어렵게 짝을 맞추니 놀라운 돌 요가 완성된 것. 죽은 자를 위한 역공간. 발견된 고분은 쌍상총(雙床塚)으로 이름 지어졌다. 또한 옛사람들은 돌아가신 그들의 조상을 위해 바다 같은 저 하늘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하고 미더운 배를 큼직한 돌로 만들었다.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안쪽을 둥글게 파고 머리둘레와 발 놓을 곳도 팠다. '주형석관(舟形石棺)'이다. 경주 남산 등지에서 발굴됐다. 돌조각 최고의 '파냄'이다.
최 관장은 최태화가 테라코타에 비중을 두고, 작품세계에는 항상 영적 세계관이 반영되고 있다는 게 뚜렷한 특징들이라고 평했다. 종교와 예술이 순수한 지점에서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 합일하는 것임을 작품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구워진 흙'이라는 뜻의 테라코타는 흙을 빚어 잘 말린 후 가마에서 구워낸다. 흙을 빚는다는 말은 자연을 빚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의 이치(法)를 확인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자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태화는 테라코타에 많은 비중을 둬 왔다. 간혹 작가의 대형 작품이 브론즈나 엄청난 무게의 돌로 제작된다 하더라도 그 원형은 늘 테라코타에서 출발한다.
◆고향은 비슬산 아랫마을
최태화는 대구시 달성군 논공 비슬산 아랫마을이 고향이다. 맨날 비슬산을 바라보며 자랐다며 자주 회고하기도 했다. 그때는 비슬산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조각은 힘이 든다. 그때 비슬산을 열심히 쳐다본 덕에 평생 조각을 할 힘이 생겼다고까지 술회할 정도다. 계명대 미대를 졸업한 뒤 홍익대 조소과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논문도 '헨리 무어'론(論)이다. 헨리 무어는 주로 돌을 재료로 하는 작업을 많이 한 세계적인 영국 조각가다. 유럽의 전통 조각에 거부감을 느끼고 원시 예술에서 이상적인 모델을 찾아 만들어진 추상적 형체의 유기적 구성 형식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초에 두어 번 전시를 가졌다. 특히 단순한 원초적 형체로써 대상의 내적 생명을 표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태화의 작품세계에서도 이런 점이 더러 발견된다. 걸작 '기댄 형상;축제'도 상당한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서는 훌륭한 약사가 되길 바랐지만 시골 소녀는 미대를 진학했다. 가족의 실망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스트레스다. 늘 아픈 사람처럼 생기도 없었다. 견디기 힘든 두통까지 겹치자 결심했다. 산 베드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말에서 떨어져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세상에 떨어져 보고 싶었다. 빈털터리로 행각의 길을 떠난 것이다. 고픈 배를 움켜쥐며 경주박물관 정원 앞에 섰을 때. 순간적인 전율이 몸을 감쌌다. 조용한 박물관 정원에 화강석에 조각된 큼직한 싯다르타의 얼굴, 불두(佛頭)와 마주하는 순간. 최태화의 모든 것은 얼어붙었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선 채 모든 것은 멈춰 버렸다. 차디찬 돌의 부처님 얼굴은 그러나 따스한 홍조를 띠고 머금은 미소를 던지며 그의 마음을 녹여주는 게 아닌가. 엑스터시. 처음으로 예술의 정신적인 가치를 체험했다. 곧 엄습해 오는 현실도 두렵지 않았다. 하찮은 돌덩이 하나가 어떻게 나의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조각 예술의 신비인가? 그리고는 조각가를 결심하게 된다. 인생이 결정된 것이다. 그로부터 지구촌 곳곳의 자유천지를 찾아 헤매는 예술 행보가 시작된다.
◆종교미술학부 교수
헨리 무어가 아즈텍문명에서 생명력을 느꼈듯 최태화는 경주의 신라문명에서 생명력을 느끼고는 곧장 이탈리아로 날았다. '메두사의 머리'가 소장된 우피치 미술관이 있고 베키오다리가 있는 피렌체로 정했다. 1982년. 이때부터 1998년 귀국 때까지 세스토 피에렌티노의 토스카나 전통 가마가 있는 '비토시' 작업장에서 밤낮을 잊었다. 대학부터 다시 시작했다. 피렌체 국립미술아카데미아 조소과와 피렌체 세라믹아트국립미술학교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작업과 함께 리오네로 인 뿔뚜레 국립미술학교 강사도 겸했으나 힘겨워 작업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귀국 전까지 꼬박 16년. 최태화의 내화토 테라코타 작품들은 대부분 여기서 제작됐다. 한마디로 "너무 힘들었다"고 당시를 말하는 최태화는 그러기에 오늘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2001년부터 인천가톨릭대 종교미술학부 교수로 자리 잡고는 퇴직 후 솔잎을 먹는 송충이 듯 대구로 결국 돌아왔다.
"우리의 불교미술은 조각이 주류지요. 신라의 불두에서 느낌을 받고 먼 조각예술의 여행을 다녀온 저로서는 원효의 몰가부(沒柯斧) 고사와도 닮은 많은 훌륭한 성인이나 인물을 테라코타 혹은 돌이나 청동으로 묘사하는 게 유일의 방법이었어요."
그러나 늘 세상의 주류에 무관심했었다. 진정 한국미술의 특성이라면 '완벽에 대한 무관심'으로 널리 이야기된다. 여기에 즉흥성이나 우연성이 가미돼 한국미술은 여전히 정당하게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게 일생 조각가로 살아온 최태화의 신념이다. 그 신념에는 굴곡의 곡선과 가시 같은 직선이 어우러져 뭉뚱그린다. 만해의 말대로 '알뜰한 속박'이 네거티브 기법으로 자유와 창조의 세계를 열고 있는 것이다. 최태화는 거기서 여태껏 알뜰하게 놀고 있다.
글=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사진=사진작가 배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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