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9)] 김익달, 학생 잡지 '학원' 펴내…포성 속에도 희망 전파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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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04   |  발행일 2022-10-04 제20면   |  수정 2022-10-04 07:26
6·25전쟁 피란지였던 대구서 배움의 즐거움 주고자 중학생 종합잡지 간행
군인까지 볼 정도로 두꺼운 독자층…탐독 청소년들 1970~80년대 '문화세력'으로 성장
김익달
1952년 피란지 대구,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란 속에서 천막교실은 열렸고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배움을 이어나갔다. 변변찮은 교과서 하나 없었다. 주위는 절망과 죽음, 이산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당시 36세의 청년 출판업자 김익달(金益達)은 '청소년을 키우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중·고생 잡지 '학원(學園)'이다. 당시 청소년에게 배움과 즐거움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실천이었다. 특히 '학원'은 훗날 '학원세대'란 칭호를 얻은 유일한 잡지가 된다. 전란의 피폐함 속에서 학생들에게 배움의 뜰을 마련한 잡지 학원이 창간된 곳이 바로 대구 삼덕동이었고, 그 중심에 출판계 대부(代父)로 불린 김익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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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대구 삼덕동에서 창간된 중고생 잡지 학원의 창간호. 창간호 표지는 컬러 인쇄를 했는데 한국 출판역사에서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대구교육박물관 제공>
2_학원_창간사
중고생 잡지 학원 창간사.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전란 속에서 '배움의 뜰'을 열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익달(1916~1985)은 국내 출판계 1세대로 꼽힌다.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상업과를 2년 수료한 그는 1945년 대양출판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출판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전쟁의 포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전란 속에 피란 온 어떤 출판업자도 감히 인쇄기를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익달은 1952년 10월 대구 삼덕동 29에 임시로 지은 판잣집 사무실에서 새로 만들 잡지의 창간사를 써 내려갔다.

"시대의 요구에 응하여 본사는 이에 중학생 종합잡지 '학원'을 간행한다. 본디 '학원'은 글자 그대로 배움의 뜰이 되어야 할 줄 안다. 우리의 장래가 모두 학생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말하는 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을 위한 이렇다 할 잡지가 없는 것이 또한 오늘의 기막힌 실정이다. 여기서 본사는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하며 본지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뜻하는 바는 중학생들을 위한 참된 교양과 올바른 취미의 앙양이다. 불행한 이 나라 학생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본디의 뜻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이 이상 더 고마운 일이 없을 줄로 생각한다."

1952년 11월 마침내 '학원'이 창간됐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김익달(金益達), 인쇄인은 하영오(河英吾), 인쇄소는 경화(京和)인쇄소, 발행처는 대구 삼덕동 29 대양(大洋)출판사였다. 당시 대양출판사의 본사는 부산이었지만 피란지 대구 삼덕동에 마련한 임시 사무실이 실질적인 본사였다. 판형은 A5판, 총 114면이었으며 가격은 4천원이었다. 창간호의 표지는 컬러였다. 소년과 소녀가 방안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창밖에는 가을 단풍이 붉다. 이는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컬러 인쇄로 한국 출판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된다. '학원' 창간 이후 대양출판사는 '학원사(學園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학원세대

'학원'은 '참된 교양과 올바른 취미의 앙양'이라는 김익달의 창간사에서 보듯 청소년 교양과 오락을 동시에 추구했다. 창간호에는 프랑스 화가 밀레의 '장작 패는 사나이'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었고, 사진화보, 박목월과 조병화 등의 시, 마해송의 수필, 정비석이 짓고 백낙종이 삽화를 그린 '홍길동전', 김용환의 연재만화 '코주부 삼국지', 셰익스피어의 전기 등이 실렸다. 또한 지식 정보 교육을 위한 '학습 취미 강좌'에서는 '사회생활' '과학' '영어' '수학' 에 대한 지상 강의가 이어졌다. 연재물 중에 정비석의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는 단연 인기였다. 학생들은 넓고 넓은 중원을 배경으로 파란만장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학원'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학생들은 매월 학원이 발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당시 '학원'을 읽지 않으면 학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독자층도 두터워졌다.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군인과 부인들까지 독자로 확보해 인기를 모았다. 한때 10만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학생들은 '학원'을 보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그들은 얼굴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학원'을 통해 소통하며 성장했다. 1950~60년대 학원을 탐독하고, 학원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자라난 그 시대의 청소년들을 '학원 세대'라 부른다. 그들은 이후 19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문화 세력'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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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창간 때부터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장편만화 '코주부 삼국지'는 가장 인기 있는 코너였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학원장학회와 학원문학상

창간호의 한 페이지는 '학원 장학생 모집' 공고가 차지한다. 김익달은 학창 시절 뼈저리게 가난했다. 그는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참 도움의 방법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나눔이 곧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무게를 덜어주는 일을 그는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통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학원장학생은 가난한 살림에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중학생들을 전국 각지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시험으로 가려 뽑았다. 뽑힌 장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의 학비 전액을 지원했다.

김익달의 학원장학회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인재의 씨앗'을 심는 것을 그는 숙명처럼 여겼다. 장학 사업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코 중단하지 않았고 그가 출판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 끝까지 지킨 것이 학원장학회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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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잡지 학원의 발행정보란. 발행처인 대양출판사의 주소가 대구시 삼덕동 29로 적혀있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학원'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학원 문학상'의 제정이다. '학원문학상'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신이 직면한 현실적인 억압을 문학작품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예비문학도들의 텃밭이었다. 또 전문적인 문학교육의 장이자 문학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대한 독자의 욕망을 충족해 준 '실천의 장(場)'이었다.

1954년 1월호에 '제1회 학원문학상'이 발표됐다. 응모작은 2천여 편이었다. 심사위원으로는 정비석,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서정주, 김동리, 최인욱, 김용호, 조병화, 장만영 등이 참여했다. 학원문학상은 1967년 11회까지 계속되면서 이제하, 유경환, 황동규, 정공채 등 시인 84명을 비롯해 송기숙, 유현종, 이청준, 김주영, 김원일, 최인호, 황석영 등 소설가 44명, 기타 평론·아동문학·희곡 부분에서 20여 명을 배출해 냈다. 이들은 '학원문단파'로 불리며 한국문학의 중추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휴전이 되면서 학원사는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학원'은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다 1979년 9월호를 내고 종간하고 말았다.

평생을 출판업에 헌신한 학원 김익달은 1985년 11월2일,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학원장학생 출신인 박범진(제14대·제15대 국회의원)은 회고한다. "능력은 겸손에서 돋보이며, 실천은 과묵에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 생애를 통해 보여 준 김익달 선생. 그의 생애 그 자체가, 바른길이 없는 이 시대에 바른 정신의 모범으로 남아 우리를 반성하게 만든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참조=윤상일 저 '학원 김익달 평전'(지상사)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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