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천일영화] 누군가에게는 죽여주는 영화, '킬링 로맨스'

  •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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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5  |  수정 2023-05-05 06:53  |  발행일 2023-05-05 제22면
국내에선 성적 초라했지만

伊 영화제 초청돼 호평 받아

상영시간내 관객 박장대소

지구 반대편의 뜨거운 호응

제작진에겐 큰 위로 될 듯

[윤성은의 천일영화] 누군가에게는 죽여주는 영화, 킬링 로맨스
영화평론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한 여배우가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한적한 섬으로 떠나 버린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한 억만장자와 사랑에 빠져 그곳에 정착해 버린다. 7년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예전 매니지먼트사 대표가 찾아와 시나리오 한 편을 건넨다. 그녀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지만 남편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그녀를 폭력적으로 대한다. 결혼 생활 내내 그의 장식품으로 살아왔던 그녀는 생각한다. 남편과 헤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이라고.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최근 개봉작 '킬링 로맨스'(이원석·2023)의 플롯은 꽤 흥미롭다. 후반부에는 그녀의 열성팬과 그녀가 남편을 죽일 모략을 꾸미고 실행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40대 이상에게는 코믹 살벌했던 '마누라 죽이기'(강우석·1994)의 리버스 버전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스타일은 너무도 독특해서 본 사람들로서도 설명이 어렵고,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설명만으로 상상이 거의 불가능하다. 동화적인 분위기의 톤 앤 매너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기상천외한 유머감각과 실험적인 진행 방식은 B급 영화에서도 황당한 수준이라 레퍼런스를 언급하기 어렵다. 모 포털사이트에는 이 영화의 장르가 '드라마, 뮤지컬, 스릴러, 누아르, 로맨틱 코미디'로 되어 있다. 작성자가 애쓴 흔적이 보인다.

문제는 이 영화가 이하늬, 이선균 주연에 75억원이 들어간 상업영화라는 점이고, 더 큰 문제는 개봉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킬링 로맨스'는 현재까지 약 18만명이라는 초라한 흥행 성적표를 들고 있다. 극장에서 감독이 의도한 바대로 깔깔대고 웃어주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불호가 대세인 가운데 이 영화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은 팬덤을 형성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는 달시 파켓, 피어스 콘란 등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평론가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다. 피어스 콘란은 SNS를 통해 이 영화를 '최근 몇 년 동안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이자 모든 B급 영화에 대한 화려한 찬사'라고 하기도 했다.

'킬링 로맨스'는 지난주에 폐막한 이탈리아 우디네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내가 그곳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본 건 오로지 외국인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국의 영화관에서와는 상반된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영 시간 내내 관객들은 박장대소하며 즐겁게 영화를 감상했으며,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에 삽입된 H.O.T의 '행복'이나 비의 '배드 보이'는 외국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도 영화가 끝나자마자 노래를 따라부르며 '여래바래'(여주인공의 팬클럽)를 자처하는 관객들이 있을 정도였다. 달시 파켓에게 왜 '킬링 로맨스'가 외국에서 더 잘 통하는 것 같냐고 물었더니 이원석 감독이 구사하는 것이 일종의 미국식 유머에 가까우면서 독창적이고 대담하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한 편의 영화가 가진 가치와 의미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국내에서의 흥행 참패는 쓰라릴 수밖에 없겠지만 지구 어느 한 편에 영화에 뜨겁게 호응해 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은 제작진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영화에 대해서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주체가 평론가라면 더더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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