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와 함께] 배영옥 '훗날의 시집'

  • 송재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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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5  |  수정 2023-05-15 07:04  |  발행일 2023-05-15 제25면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배영옥 '훗날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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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인

어떤 유작시에는 시인의 삶이 도드라져서 먼저 뭉클해진다. 대구 출신 배영옥의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는 구절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박정만 시인의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시와 시간성과 공간성을 나누어 가지면서 아름답게 짝짓기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애절과 곡진을 통과했다. 자신을 예감하고, 생사에 대한 비가를 이토록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무채색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겪었던 말과 통증을 따라가면 그것이 자신의 말과 통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된다.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는 생각은 죽음을 미리 기워 옷을 만들어 입어보는 행사이기에 그 구절에 한참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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