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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숨기고 살았는데 이제는 필자가 왕족임을 공개할 때가 된 것 같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부 사무관이 초등학생 자녀의 담임교사에게 갑질한 사건 때문이다. 그가 담임교사에게 보냈다는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라는 e메일이 공개되자 비난이 쏟아졌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고 변명한 사과문은 오히려 침묵만도 못한 뭇매를 자초했다.
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는 나라의 공무원 입에서, 왕의 DNA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다니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공화국 체제하에서 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왕정을 꿈꾼다는 말인가. 공무원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 민주주의국가에서 당연히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겠다는 것인가.
요즘 세상은 중간이 없고 양극단으로만 달리고 있다. 가장 큰 책임은 무책임하고 공격적인 말의 생산공장인 정치권이다. 일관된 정책이나 신념에 따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넘쳐나고 있다.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생략한 채 소속 정파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극적인 공격을 남발하고 있다.
한국언론학회장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준웅 교수는 저서 '말과 권력'에서 말하기와 민주주의가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누구나 말할 기회를 누리는 동시에 말하기 방식이 정교화된 사회가 정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구성할 가능성이 크고, 이처럼 폭력이 아닌 말을 이용해서 정당한 권력을 구성하는 과정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정치권에서 말의 품격이 사라졌다. 촌철살인의 정치적 언사가 아닌 비난과 저주만 남아있다. 품격이 없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최근 청소년들의 잔치인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총체적 부실 속에 마쳤다. 반성은커녕 뒤풀이로 서로 남 탓만 하는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이번 잼버리는 탐욕스러운 정치인들과 무능한 공무원들이 만들어낸 참혹한 컬래버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 탓이오'를 먼저 말했어야 마땅하다.
다시 총선이 다가오는지 정치 한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럴 때마다 곱게 늙고 싶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 정치권에 몸담고 나서 말에 가시가 돋고 눈빛이 변한 사람을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게 남은 소중한 인생인데, 남을 비난하고 비난받으며 허투루 살기에는 아깝다.
그래도 정치권에 가장 많이 진출한 직업군인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냈고, 헌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마냥 침묵하는 것도 비겁한 듯하여 한마디 하고 싶다. 정치적 생명을 연명하고 싶다면 국민을 어려워하는 정치를 하기 바란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가 한 만큼이라도 고민한 후에 말하라.
이 글의 첫 문장 때문에 혹시 필자를 전주 이씨로 오해하실까 봐 공개하는데 경주 이씨다. 경주 이씨가 무슨 왕족이냐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필자의 선조가 바로 고조선을 세우신 단군왕검이시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분들도 왕의 DNA를 가지고 계신 왕족이시다. 그러니 앞으로 모든 정치인들은 말을 함에 있어 국민을 왕처럼 생각하면서 품격있게 말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왕의 DNA를 가진지라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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