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가는 청정관광1번지 산소카페 청송 .14] 소헌공원과 찬경루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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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15 08:16  |  수정 2023-11-15 08:18  |  발행일 2023-11-15 제23면
세종 명으로 지은 객사 운봉관·누각 찬경루 청송 중심에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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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청송읍 용전천 변 소헌공원에는 세종의 명으로 지어진 객사 운봉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으나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청송읍 앞으로 은빛 모래밭을 거느린 용전천(龍纏川)이 유유히 흐른다. 뒤로는 방광산(放光山)이 단단한 형세로 드리워져 있다. 지형이 곧 성(城)인 이 땅에 오래전 관아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지금은 청송의 주요 공적 건물들이 집중해 있다. 그 한가운데에 옛 객사와 누각 하나가 순정한 권위와 위엄으로 남아 있다. 이 일대를 '소헌공원'이라 부른다. 항상 개방되어 있는 주민들의 휴식 장소이자 각종 행사가 열리는 청송 군민의 문화공간이다. '소헌'은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비 청송심씨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일컫는다. 객사와 누각을 짓도록 한 것은 세종이었다고 전한다.

소헌공원 명칭 세종 비 시호서 따와
전시회·음악회 등 청송문화 중심지
1896년 운봉관서 청송의진 첫 창의
찬경루, 소헌왕후·심씨 시조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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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여덟 아들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지은 찬경루.


◆ 소헌공원

태종의 아들 충녕(忠寧)과 청송심씨 심온(沈溫)의 딸이 가례를 올린 것은 1408년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418년 왕세자에 책봉된 충녕대군은 같은 해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고 심온의 딸은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세종과 소헌왕후다. 세종의 즉위와 함께 소헌왕후의 고향 청송은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심온은 영의정에 올랐다. 그해 심온은 세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가 떠나는 날, 거리는 왕의 장인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수레와 말이 도성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상왕 태종은 다시 외척이 득세할 것을 염려했다. 결국 심온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마자 체포된다. 그는 불경죄로 처형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아내와 딸은 관비가 되었다. 태종은 소헌왕후마저 해하지는 않았다. 비(妃)로서 내조의 공이 크고 많은 자녀를 낳아 왕실을 안정시켰다는 공을 인정한 것이었다.

14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시대가 되었으나 소헌왕후의 집안은 복권되지 못했다. 세종은 청송군수 하담(河擔)으로 하여금 청송객사와 누각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세종 10년인 1428년 청송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찬경루(讚慶樓)가 건립됐다. 이후 세조 5년인 1459년에는 청송군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소헌왕후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였다. 이후 청송은 도호부의 위상을 437년간 지켜오다가 1895년 갑오개혁 때 다시 군이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운봉관과 찬경루는 많은 일을 겪으며 중수와 중건을 거듭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 역시 바뀌었지만 이 일대가 청송의 중심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청송군에서는 2004년 일대 부지에 대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하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운봉관과 찬경루의 복원과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010년 청송 군민과 출향인들을 대상으로 공원의 명칭을 공모했다. 그렇게 결정된 이름이 '소헌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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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제각과 청송심씨사적비 뒤로 객사 운봉관이 보인다.

◆ 청송객사 운봉관

'운봉'이란 '구름 속의 봉황'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객사는 조선 시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들의 숙소였지만 중앙 정당은 왕의 전패를 모신 왕의 공간, 임금 그 자체였다. 그래서 객사는 어느 고을에서나 가장 중심된 곳에 가장 으뜸 되는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정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익사(翼舍)를 펼쳤고 정당의 지붕은 익사의 지붕보다 높았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국의 읍치에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길 떠나 아무리 낯선 고을에 닿아도 객사가 자리한 곳이 바로 그 땅의 중심임을 알았다.

운봉관 역시 그러한 기본을 따르고 있다. 운봉관은 잡석을 쌓은 기단 위에 올라있다. 정면 3칸의 정당은 측면과 배면을 벽으로 감싸고 맞배지붕을 올렸다. 좌우 익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봉관은 숙종 43년인 1717년, 순조 12년인 1812년에 중건되었고 고종 8년인 1871년에도 중수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 초봄 분연히 일어난 청송의 유생들은 운봉관에 모여 청송의진(靑松義陣)을 창의했다. 이후 운봉관은 1918년경 일제에 의해 정당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청송도호부의 관아 건물들 역시 모두 훼손되었다. 동익사만 화를 면해 운봉관 현판을 달고 보존되었으며 한동안 청송면사무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의 운봉관은 2008년에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운봉관은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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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공원 한쪽에는 청송부사송덕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 찬경루

운봉관의 평평한 마당은 용전천을 향해 서서히 기울다가 뚝 떨어진다. 그 절벽의 가장자리에 찬경루가 서 있다. 천의 맞은편에는 현비암(賢妃岩)이라 불리는 용머리 형상의 기암절벽이 솟구쳤는데 '현비'는 '어진 왕비'라는 뜻으로 이 또한 소헌왕후를 기리는 이름이다. 현비암의 등 뒤에는 보광산(普光山)이 우뚝하다. 보통 객사에 부속된 누는 조정 사신의 연회나 유생들의 시문회 장소로 이용되지만 찬경루는 조금 다르다. 찬경루는 보광산을 바라보고 있다. 보광산에 청송심씨 시조인 심홍부의 묘가 있다. 당시 관찰사인 홍여방이 쓴 기문을 보면 '소헌왕후의 덕과 어머니로서의 의표와 금지옥엽인 그의 후손들은 우리 조선 억만 세의 끝없는 복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 누에 올라 그 옛터를 바라보니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찬경루라고 명명한다'고 했다. 즉 '찬경'은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와 그 뿌리인 청송심씨 시조를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다. 용전천이 범람해 묘를 찾을 수 없을 때면 청송심씨들은 찬경루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찬경루는 정조 16년인 1792년 청송 군내에 큰불이 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세웠다. 지금의 찬경루는 그때 중건된 것으로 2008년에 중수하고 단청을 했다. 찬경루는 정면에서 보면 누각의 형태이고 뒤편에서 보면 단층에 가깝다. 정면 4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배면의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다. 방의 양측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고 그 앞에 2단의 계단을 놓아 누상으로 오르게 했다. 나머지 14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정면과 측면에 계자난간을 이어 둘렀다. 온돌방의 기둥은 사각이며 나머지는 모두 둥근기둥을 세웠다. 세종의 여덟 아들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2칸씩 지었다고 전해진다. 누각 안에 '송백강릉(松柏岡陵)'이라 쓴 커다란 현판이 있다. 처음에는 소헌왕후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썼다고 전하며 화재 이후 청송도호부사였던 한광근의 아들 한철유가 안평대군의 글씨를 그대로 옮겨 썼다고 한다. 송백강릉은 '시경'에 나오는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산마루와 같고 구릉과 같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송백'으로 표상되는 청송심씨의 지조와 후손들의 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후 소헌왕후의 첫째아들은 문종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세조가 되었다. 심온은 문종 때 복위되었고 소헌왕후의 동생인 심회는 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로도 청송심씨 집안의 번영은 계속되었고 소헌왕후는 세상을 떠난 뒤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에 추상(追上)되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찬경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등의 시가 전해지며 이심원, 홍성미, 황효원, 한광근, 양극선, 신익선 등의 시편이 누마루에 걸려 있다. 소박한 익공에 단청이 화려하고 평방 부리마다 피어난 태평화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찬경루는 나라의 보물이고 '소헌'은 청송의 중심에 있다. 이곳 소헌공원에서 충효캠프, 문학의 밤, 청소년문화마당이 열린다. 청송의병 추모 공연, 사회복지 박람회, 사진 전시회, 서화 예술 전시회, 인문학 콘서트 등 각종 음악회와 전시회가 펼쳐진다. 부처님오신날에는 봉축탑 점등 법회가 열리고 성탄이 다가오면 트리에 불을 밝힌다. 안평대군의 '송백강릉'과 홍여방의 '찬경'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셈이다. 오래된 중심의 힘은 지금도 공공을 위한 중심으로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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