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0> 이병철, 삼성물산 '반도호텔'로 이전

  •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 |
  • 입력 2024-04-26 08:02  |  수정 2024-04-26 08:03  |  발행일 2024-04-26 제13면
美대외원조기금 60만달러로 독일산 모방직기 수입…제일모직의 시작

2024042201000775900032762
제일모직공장을 둘러보는 이병철. <삼성그룹 제공>

삼성물산은 사세 확장에 따라 종로2가 영보빌딩에서 1954년 7월1일 본사를 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반도호텔 빌딩 530호로 이전했다. 반도호텔은 노구치 시타가우라는 민간인이 1936년에 세운 호텔로 당시 최고의 규모였다. 반도호텔 이전에 1914년에 세워진 조선호텔이 국내 최초의 호화호텔이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총독부의 철도국이 설립한 호텔이었다. 어느 날 노구치 시타가우는 사람을 만나려고 조선호텔 정문에 들어섰다. 그러자 수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장을 저지했다. 옷차림이 너무 허접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입장을 하긴 했는데 기분이 나빴다. 그는 흥남 질소비료 공장을 돌아보다가 서울에 약속이 있어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급히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날 밤 그는 조선호텔을 능가하는 호텔을 설립하려고 결심했다. 노구치 시타가우는 당시 일본질소 콘체른의 회장으로 아시아 최대의 압록강 수풍댐과 흥남질소 등과 그 산하에 약 26개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불화수소를 공급하지 않아 문제 됐던 신월화학공업도 그의 소유였다. 그는 3층인 조선호텔보다 두 배 이상 높은 8층의 반도호텔을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세웠다. 지하 1층~지상 8층 객실 111개에 15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는 객실이 69개밖에 없던 조선호텔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반도호텔은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최고층 건물 중 하나였다. 당시 반도호텔은 5층까지는 사무실, 6·7·8층은 호텔 객실이었다. 반도호텔 내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3대의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필자도 초등학생 시절인 1962년경 그걸 타본 적이 있다.

당시 삼성물산공사는 그 호텔의 5층 30호실을 사용했다. 삼성물산 본사는 40평 크기였으며 이병철, 조홍제 부사장 등 총 19명이 근무했다. 당시 이병철과 조홍제는 가운데에 사무실을 놓고 양쪽 끝에 집무실에서 근무했다. 삼성물산의 조직은 경리부, 영업부, 부산사무소, 도쿄지점 등이었다. 삼성물산의 주요 수출품은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고 그 외에 약간의 공예품과 모직물 등이 있었다. 수출에 비해 수입 품목은 매우 다양하여 비료, 종이류, 섬유, 비철금속, 목재류, 화공약품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1957년 삼성물산의 연간 수출입실적은 1천50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연간 교역량의 약 3.81%를 차지했다. 삼성물산은 나날이 성장하여 1959년 1월15일에는 총자본금이 1억5천만환이었으며 종업원은 142명에 달했다.


제당업 성공 뒤이을 후속 사업 논의
면방직산업 진출 최우선 고려했으나
시설영세·외국의존 높은 모직 선택

조홍제 FOA 원조금 받아내 독일행
제안가보다 20만달러 낮은 값에 계약
이 거래가 韓·獨간 민간무역 '제1호'



◆제일모직의 설립

새 사무실에서 제당업으로 성공한 이병철과 조홍제는 또 다른 사업을 찾는다. 삼성그룹의 수뇌부가 이사회를 열어 업종을 선택하는 회의가 열렸다. 1954년 초의 일이다. 처음에는 면방직 산업의 진출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공장의 설립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조홍제가 상공부 당국과 의견을 나눠보니 "면방직 공업은 이미 여러 기업가들이 공장을 건설 중에 있고 또 기존시설도 대부분 복구되어 가동 중에 있는 만큼 더 이상 면방공장의 신설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시설규모가 영세하여 많은 양을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는 모직 분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것이 당국의 의견이었다. 조홍제는 상공당국과 여러 차례에 걸쳐 협의한 끝에 면방직이 아닌 모직 공장을 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상공부 당국이 이러한 견해를 낸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1953년 말, 즉 6·25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국내에 면방직 방적기가 무려 15만7천809추가 있었고 직기 수는 3천715대였다. 6·25전쟁 직전에는 무려 9천75대였던 것이 전쟁 와중에 상당수 파손되어 3분의 1 규모로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상당 부분이 계속 복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모방직 방적기는 6천347추에 106대의 직기만 가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면방직에 비해 모방직 방적기가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모방직의 경우 당시 한국에는 마산과 밀양 등지에 소규모의 모직 시설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양복지와 같은 고급 모직물은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2024042201000775900032763
1962년 집무실에 앉아 있는 조홍제. <효성그룹 제공>

◆마카오 신사

한때 '마카오 신사'라는 유행어는 영국에서 수입된 양복지로 양복을 해 입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양복에 쓰이는 모방직 제품 대부분이 외제였다. 따라서 조홍제는 현대적인 대규모 공장을 세워 가동한다면 수입 대체 산업으로도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모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생산이 시작되면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조홍제는 공장 설비를 위한 자금 지원을 얻기 위해 미국 원조 당국과 접촉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러한 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외국인이 공장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공장을 가동할 능력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모직공장이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방적, 즉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든 후 염색, 가공, 직포 등의 공정을 거쳐야 하고 그것들은 각기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었으므로 한국의 기술 가지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홍제는 이러한 공정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판단한다. 즉 '울톱 제조공정'을 제외한 최신식 일관생산시설 1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홍제는 미국의 FOA에서 대외원조자금 60만달러를 받아내게 되었다. 조홍제는 일본의 '대일본모직'과 미국의 모직공장을 둘러보았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다시 조홍제는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시에 있는 기계무역상인 C.일리스라는 회사를 찾아갔다. 조홍제는 일본에서 독일경제학과를 나왔으므로 나름대로 독일의 기계 산업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반도호텔
이영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에 나온 반도 호텔. <서울의 휴일 장면 캡처>

◆스핀바우 사와 협상

조홍제는 여러 회사를 방문한 끝에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계설비가 성능 면에서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그롬베크 상무를 만나 스핀바우 사의 기계 성능에 관해 문의하였다. 그롬베크 상무는 조홍제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가장 믿을만한 회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는 서류 파일을 조홍제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모직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온도, 습도, 전력, 노동력, 교통, 용수, 수질, 종업원의 기술, 지도, 훈련내용 등 무려 48개 항목의 문제점과 대응책이 적혀 있었다.

조홍제와 스핀바우 사 간의 가격 흥정이 독일 현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스핀바우 사는 80만달러가 넘는 가격을 제시했다. 자금이 60만달러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브레멘의 호텔 방에 누워 이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날 조홍제는 스핀바우 사의 그롬베크 상무에게 "내가 준비한 달러는 60만달러뿐입니다. 우리는 달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핀바우 사 사장은 기곗값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기계 자체의 성능이 우수한 것만 계속 강조하였다. 다시 조홍제가 반론을 제기했다.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에게는 그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60만달러밖에 준비를 못해서 이것 가지고는 5천추의 모직 생산시설밖에 갖추지 못하지만 얼마 안 가서 몇 배로 증설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탈리아, 프랑스의 기계회사와도 가격을 협상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핀바우 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이 회사와 거래하고 싶습니다. 대신 기계가격은 내가 제시한 선에 맞추어 주십시오"라고 떼를 썼다.

2024042201000775900032761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스핀바우 사 사장은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 얼마 후 아침에, 호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조 사장, 축하합니다." 결국 스핀바우와 조홍제 간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계약내용은 5천추 1식을 60만달러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스핀바우 사는 당시의 기계판매로 19만5천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의 민간무역 제1호였다. 그 얼마 후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술자들이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한국의 산업 사상 민간 기업이 이룩한 최초의 기술 도입이었다. 제일모직의 선진기술 도입과 연구개발은 최첨단 모직기술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작가·전경련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