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 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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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7-10  |  수정 2024-07-10 08:06  |  발행일 2024-07-10 제18면
왜구로부터 울릉도 지킬 최고의 비책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수 있는 지형과 거센 풍랑

가마·솥·도르래, 장군이 세세하게 기록한 왜적의 흔적

330년 전 바라본 독도, 울릉수토역사관서 만난 이야기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지난해 7월, 독도에서 김흥구 사진작가가 찍은 울릉도 사진(김흥구 작가 제공).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독도에서 울릉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동안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끈질기게 주장해온 일본인 학자 가와카미 겐조는 장한상 장군의 기록대로 울릉도에서 독도를 육안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흐린 날에도 육안으로 독도에서 울릉도를 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 초기 관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는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 두 섬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이 사진을 촬영한 날은 기상이 좋지 않아 여객선이 독도에 접안하는 것도 힘든 날이었다.
운이 좋았다. 뱃멀미 없이 밤새 평온하게 달려 크루즈에서 내린 시각은 아침 7시. 하루를 시작하기 딱 좋은 때다. 장한상 장군의 기록을 따라 장대한 수토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만큼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일단 아침부터 든든하게 먹자! 그때부터였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굳이 맛집을 검색해 보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들어간 곳이 마침 허영만 백반 기행도 다녀갔다는 손꼽히는 맛집이었고, 식당 사장님의 남편은 울릉도 곳곳을 누비며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멋쟁이였고, 주방에서 홍합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그 짧은 사이 그의 휴대전화 속 사진만으로도 울릉도 명소 관광을 끝냈고, 택시를 탔는데 마침 3대째 울릉도에 살고 있다는 기사님을 만나 울릉도 근현대사도 초스피드로 들었고, 점심 식당에서는 직접 물질을 해서 홍합이며 따개비를 공수한다는 머구리 사장님을 만나 요즘 울릉도 바닷속 근황까지 들었다. 벌써 끝?

어라… 이게 아닌데… 반나절 만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장군을 따라가는 우리의 수토여정이 이렇게 쉽고 편안하고 빨라도 되는 것일까. 너무나도 친절하고 다정한 섬사람들이 애꿎게도 수토기행의 방해꾼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장군의 후손인 순천장씨대종회장 장선호씨가 왜적 앞에 장검을 꺼내들 듯 허리춤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장한상 장군의 기록이다.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 전시된 작품. 감상 위치에 따라 울릉도를 바라보는 2개의 시점을 체험할 수 있는데 오른쪽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둠을 뚫고 울릉도로 들어가는 수토사의 시점을 표현한 것이다. 두려움과 역사적 사명으로 가득 찬 수토사들의 시점을 체험해볼 수 있다.
◆330년 전 왜적의 흔적으로 둘러싸인 울릉도

'서쪽으로 큰 골짜기를 바라보면 사람이 살던 터가 세 군데 있고, 또 북쪽으로는 사람이 살던 터가 두 군데 있으며, 동남쪽 긴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던 터가 일곱 군데, 돌무덤이 19개가 있었습니다.'

장군이 울릉도 수토 후에 남긴 기록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을 읽어 내려가던 장선호 회장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같은 의문일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장한상 장군이 처음으로 울릉도 수토에 나선 시기는 1694년(숙종20). 당시는 울릉도 '쇄환(刷還)정책'이 실시되던 시기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백성이 살게 되면 동해안에 들끓는 왜구들이 노략질할 것이고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강원도까지 침략할 것을 우려해 '울릉도의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했다'. 태종실록에 기록된 이 조처를 두고 '섬을 비운다'고 해서 '공도(空島)정책'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펼칠 때 '주인 없이 비워진 땅' '섬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곡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 집터와 돌무덤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로 편입시킨 이후부터 조정에서 쇄환정책을 쓰기 이전까지, 그사이 우리나라 백성들이 울릉도에 살던 흔적일까?

"그건 아닌가 봐. 여기, 다음 단락에 나오네. 동남쪽 해안에 가마 3개와 솥 3개가 있는데 모양이 우리나라 양식이 아니었대. 가마에는 발도 없고 뚜껑도 없는데 2말 쌀로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 솥은 너비와 지름이 한 자(약 30㎝) 남짓이며 깊이는 두 자 정도로 물 네댓 통을 담을 수 있을 정도… 와,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남기신 거야? 무관은 그저 싸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동행한 장군의 후손 장수용씨가 기록을 읽어 내려가다, 장군의 허를 찌르는 섬세함에 혀를 내둘렀다.

"목적이 분명한 기록이니까!"

장선호 회장의 얼굴이 사뭇 비장하다. 서쪽 골짜기에서도 솥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 역시 '저들(일본)'의 물건이라고 기록돼 있다. 북쪽 포구에 있는 도르래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서남북 섬의 사위가 모두 '저들'의 흔적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장한상 장군은 섬의 지형에서부터 가파른 돌산에 뿌리내린 수목의 종류, 그곳에 깃든 날짐승과 길짐승, 바다의 어류, 수토기간의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이어가며 끝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는데, 기록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 정체가 드러났다.

'산골짜기에 동구(洞口)가 있으니 만일 왜구를 막을 방책을 염려한다면, 이곳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며, 저들이 배를 오래도록 묶어두고 싶어 해도 풍랑이 일면 필시 배는 보존되지 못할 형세입니다.'

왜구로부터 울릉도를 지킬 최고의 비책, 오직 이 섬만이 알고 있던 것이다.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서 만난 울릉도 최초의 문화관광해설사이자 울릉도 토박이 박순덕씨. 수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울릉주민이 생각하는 장한상 장군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2024년 장군의 후손들이 써 내려가는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울릉군민의 날이 언제인지 아세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기념일도 모르는데 울릉군민의 날까지야… 분명 알 턱이 없는데도 해맑은 해설사의 얼굴을 보니, 왠지 내가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이곳은 태하리에 자리한 울릉수토역사전시관. 수토 역사는 물론 울릉도 개척의 역사를 한 곳에서 느끼고 볼 수 있는 울릉도 대표 전시관이다.

"독도의 날은 많이들 알고 계시죠? 독도의 날이 바로 울릉군민의 날이에요."

아! 저절로 도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울릉도와 독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 세트로 묶여 다니는, 한 몸과 마찬가지인 섬이었던 것이다.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울릉도 비경으로 손꼽히는 대풍감. 이곳에서 섬과 섬 사이, 그것을 이어주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섬으로 존재하던 어제와 오늘이 보이고, 그것을 잇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울릉도 쇄환정책이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장한상 장군의 수토가 시작되고 190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침탈야욕이 갈수록 거세지자 고종은 이를 막기 위해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을 반포하고 이규원을 감찰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이규원은 울릉도를 살펴본 뒤 사람이 살 만하다고 판단했고, 이듬해 16가구 54명이 정부 지원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살게 된다. 주민 수가 점차 늘어나자 마침내 1900년 10월25일, 고종은 울릉도를 독립된 울릉군으로 격상하고,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발령했다. 10월25일, 독도가 울릉군의 섬임을 전 세계에 공표한 날. 바로 그날이 울릉군민의 날이었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라, 육지로 시집갔다가 남편과 함께 다시 울릉도로 들어왔다는 박순덕 해설사는 울릉군민으로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 섬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2008년 울릉군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하던 첫해부터 활동을 시작해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곤 한 해도 쉬지 않고 뛰었다고 했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섬 소녀 같았다.

"해설사 한 지 16년 정도 됐는데 가끔… 손에 꼽을 만큼 적긴 해도 가끔 일본인은 한 번씩 만나거든요. 그런데 장한상 장군의 후손을 이곳 수토역사전시관에서 만나게 될 줄은 또 몰랐네요. 저는 장군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가족 같은, 우리 조상 같은 느낌인데… 아, 이상하게 일본인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데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일본인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 늦게 수토기행을 시작한 듯 느껴져 갑자기 조급함이 생겨났다. 어서 빨리 330년 전 장군처럼 우리도 독도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그 섬에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독도가 개방된 지 불과 20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요. 그때 청와대에서 관광객들이 독도에 입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한 분, 그분이 이제는 울릉도에 들어와 사신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같은 울릉군민으로 살고 있답니다. 여기 진짜 살기 좋거든요."

목소리에 울릉군민의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해설사의 환한 얼굴 위로 우리가 앞서 만났던 택시 기사님, 식당 사장님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섬에 대해 묻지 않아도 자꾸만 얘기해주고, 더 얘기해주지 못해 안달이던 다정하고 정 많던 그 얼굴들.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해발 340m의 망향봉 정상에 있는 독도전망대. 날이 맑으면 독도전망대에서 87.4㎞ 떨어진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처럼 장선호 순천장씨대종회장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바라보고 있다.
330년 전 울릉도에는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던 일본인들이 남몰래 둥지를 틀었다면, 2024년 울릉도에는 우리 영토를 사랑해마지않는 진짜배기 주민들이 더 단단히 둥지를 틀고 있다. 330년 전 장군이 독도를 바라보았던 곳, 그곳은 초목과 괴석으로 아찔하고 가파른 '중봉'이었지만 이제 장군의 후손들이 독도를 바라보는 곳에는 인심 좋고 경치 좋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엔 우리 땅을 사랑해서 깊이 뿌리를 내린 이들이 하루하루 쌓아 올린 삶의 이야기들이 켜켜이 산을 이루고 있다. 자, 이제 독도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330년 전의 그 날처럼, 섬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공동기획: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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