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구석구석 로컬 힙 프로젝트 .3] 고향의 서정과 우정, 청도의 누정

  • 박관영,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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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9-19  |  수정 2024-09-19 07:40  |  발행일 2024-09-19 제14면
동창천 절벽 위 우뚝 솟은 '삼족대' 자족의 삶 일깨우네
[청도 구석구석 로컬 힙 프로젝트 .3] 고향의 서정과 우정, 청도의 누정
청도 동창천을 휘감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정자 삼족대 (三足臺). 조선 중기 문신 김대유가 세 가지가 족하다는 의미로 그의 호를 따라 이름 지은 정자다. 벽을 세우지 않아 사방이 열려있는 누각과 정자를 통칭하여 누정이라 하는데, 누각은 2층 이상의 큰 규모로 관아의 정치, 행사, 연회에 쓰이는 건물이고 정자는 비교적 작은 건물로 개인의 휴식, 학문, 교육을 위해 쓰이는 사적인 공간이다. 작은 사진은 삼족대 현판.
[청도 구석구석 로컬 힙 프로젝트 .3] 고향의 서정과 우정, 청도의 누정
청도 8경 중 하나인 유등연지와 군자정. 깊이 2m, 넓이 7만㎡에 달하는 유등연지는 과거 신라지라고도 불렸다. 해마다 7~8월이면 연꽃이 만발하는데 조선시대 문신인 이육 선생이 무오사화 때 이곳에 은거하며 못을 넓혀 연을 심고 군자정을 지어 후학에 힘쓴 곳이다. 작은 사진은 군자정 현판.
사화 겪은 김대유 귀향후 삼족대 건립
정자 이름 '벼슬·밥상·수명' 만족 의미

88칸 운강고택에 딸린 정자 '만화정'
학비·숙식 제공한 근대화 교육 장소

유등연지 '군자정' 한송이 연꽃 같아
이육 선생 무오사화후 은거때 지어


맙소사, 추석에 이런 날씨라니! 푹푹 찌는 역대급 늦더위에 한숨이 푹푹, 땀이 뻘뻘 났다.

"그래도 정자는 역시 정자네. 안 움직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땀은 가신다. 우리 어릴 적에는 이런 데 커다란 모기장 쳐놓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자고 그랬는데. 동규 니 기억나나?"

새마을운동 시대를 오남매 맏딸로 살았던 어머니는 그 시절 모기장 기워 쓰던 추억을 꺼내놓고, 청도의 중심 고수리에서 나름 부잣집 맏아들로 살았던 아버지는 여름이면 정자가 과외 공부방이 되곤 했던 이야기를 꺼내놓으신다. 그 순간, 휴대폰에서는 오늘도 폭염 재난 문자가 쏟아진다.

"재난이다, 재난.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에도 여기가 재난 대피소였다 아이가.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그런 사화(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꼭 청도에도 이런 누정이 생겨났다."

청도군 관광택시 기사인 외삼촌은 아무래도 남몰래 청도 역사 과외를 따로 받는 모양이다. 외삼촌의 설명에는 늘 구체적인 숫자가 줄줄 따라붙는데,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누정은 290개가 있는데 그중 경북지역에만 1/3에 달하는 102개가 있고, 조선 시대 문헌 기록에 나오는 청도의 누정은 무려 6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앉은 이곳은 청도에 남아있는 누정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곳이다. 때는 바야흐로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던 신진사림파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기묘사화 직후였다.

[청도 구석구석 로컬 힙 프로젝트 .3] 고향의 서정과 우정, 청도의 누정
만화정은 동창천과 청도들녘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운강고택의 부속 정자다.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자 근대화 교육의 강학장소로도 쓰였고 6·25전쟁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묵어갔던 곳이기도 하다.
◆만족을 배우는 공간 '삼족대'와 '운수정'

"1519년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그해,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한 선비가 모든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곳 청도로 내려왔다. 말하자면 연좌형이었어. 그것도 두 번째 연좌형이었지."

삼족대 마루에 앉아 도도히 흐르는 동창천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졌다. 이 정자의 주인 김대유(金大有·1479∼1552)는 1498년 무오사화로 능지처참당한 김일손의 조카이자, 1519년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무오사화 때 삼촌이 죽자 아버지와 함께 전북 남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청춘을 보내야 했고,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자 모든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고향 청도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하게 된다.

"그런데도, 참… 글 읽는 선비라 그런가. 그 모진 세월을 겪고도 세 가지가 족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현판에 새겨진 한자가 눈에 들어온다. 한자를 잘 모르는 이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단순한 세 글자, 삼족대(三足臺).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만족하고,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수명도 만족한다 하여 삼족(三足)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를 보면 볼수록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만족한다 할 때 원래 발족(足)자를 쓰는 거예요?"

그러자 외삼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滿足)이란 발목까지 차오면 적당한 시점에서 멈출 줄 아는 것, 목 끝까지 차오르도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발목 정도 가득 차면 모자람이 없다고 여길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만족, 충족, 풍족, 흡족… 지금까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모든 단어들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김대유 선생에겐 족한 것이 하나 더 있었어. 여기 올라올 때 관리인이 쓰고 있던 정자가 하나 더 있었잖아? 그게 운수정(雲水亭)이라는 것인데, 김대유 선생이 동갑내기 절친이었던 선비 박하담(朴河淡·1479∼1560)과 같이 청도 유생들에게 강학하던 장소였지.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친구. 사실 청도에서 누정을 이야기할 때, 친구 사이였던 이 두 선비의 이름만 기억해도 부족함이 없어. 청도에서 유명했던 만석꾼의 정자도 사실 이 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거든."

이야기의 물결은 벌써 발목에서 찰랑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도, 글자 그대로 '만족'을 모르던 인간 아니었던가. 게다가 만석꾼의 정자라니!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다.

[청도 구석구석 로컬 힙 프로젝트 .3] 고향의 서정과 우정, 청도의 누정
소요당 박하담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후손인 박정주가 1809년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운강고택. 사랑채와 행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마당을 건너면 그 뒤로 안채, 곳간채가 다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 당시 만석꾼으로서의 위세를 보여준다.
◆나눔을 채우는 공간 '운강고택'과 '만화정'

"여기가 지금은 여든여덟 칸의 큰 살림집으로 남아있지만, 처음에는 박하담 선생이 서당을 세웠던 자리라고 해."

선조가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후손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을 건립했고, 이후 운강(雲岡) 박시묵(1814~1879)이 1824년에 중건하면서 운강이란 당호를 붙였다. 바로 조선 후기 양반집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운강고택이다.

"와, 이게 싹 다 곳간이네. 이맘때쯤이면 여기에 천장 가득 나락이 쌓였을 것 아니가. 배곯던 그 시절에는 이 곳간만 봐도 배불렀겠다."

어머니는 운강고택의 드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ㅁ'자 형태로 배치된 곳간문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열어보신다. 쌀 넣던 대형 뒤주, 그 옆으로 잡곡 넣던 조금 작은 창고, 그 옆에는 쌀 찧던 디딜방아까지. 곳간 안은 한여름에도 제법 서늘했다.

곳간을 다 지나고 나자, 그 뒤로 운문 들판을 내려다보며 정자가 하나 서 있다. 1856년경에 세운 별당, 만화정(萬和亭)이다. 운문 들판의 이름이 만화평(萬花坪)이라는데 만화정은 만화평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드넓은 곳간과 평야를 내려다보는 정자라니. 만석꾼답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어쩌면 이것은 선조 박하담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520년에 김대유 선생과 박하담 선생, 두 친구가 의기투합해서 곡식 모을 창고를 지었어. 그때는 가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거든. 그때를 대비한 것이지. 청도 관아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창(東倉)이라고 불렀는데, 강 이름인 동창천도 거기에서 비롯된 거야. 운강고택의 곳간이 사실은 동창을 이어서 수많은 주민을 먹여 살렸지."

그 옆에 딸린 정자, 만화정도 단순한 정자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으로 상륙해서 청도성이 함락하자 박하담 선생의 후손들이 의병을 조직한 장소였고, 고종 시기에는 전통 서원 교육을 개혁하고자 근대화 교육을 했던 강학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이 강학소에서는 학생들에게 학비와 숙식까지 다 제공해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게 했는데 이것이 훗날 장학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또 6·25전쟁 때는 동창천 가로 몰려든 피란민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고택의 거대한 곳간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밀양박씨가 이런 집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응? 그런 게 청도에는 그 옛날부터 있었다, 그 말이다!"

어머니 박연조와 외삼촌 박동규, 두 분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여유를 누리는 공간 '유등연지와 군자정'

'군자정(君子亭)'은 청도읍성이 있는 화양읍에 있다. 유등연지 거대한 연꽃밭 한가운데 한 송이 연꽃처럼 정자가 심겨있다.

청도 로컬힙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우리는 청도를 방문할 때마다 유등연지의 연꽃이 피는 과정을 오며가며 시시각각 지켜보았다. 지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푸른 연은 겁도 없이 여기저기서 분홍색 작은 손톱을 내밀더니 다음 순간엔 어느새 봉긋하게 피어올랐고, 그 다음번에는 마침내 화사하게 고운 속살을 터뜨렸다. 꽃의 여정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재난 상황의 폭염 속에서도 꽃은 피는구나, 이렇게 환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구나 싶었다. 이곳 역시, 조선 시대 문신인 이육 선생이 무오사화로 은거할 때 연을 심고 정자를 세운 아픈 역사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연은 꽃 중에 군자라고 해서 정자의 이름도 군자정이 됐지."

설명은 그걸로 족했다. 환하게 펼쳐진 연꽃을 보니, 정쟁으로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선비들의 시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순간에 최선을 다하던 그들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도의 누정은 그런 공간이다. 우리는 정자와 누각, 건축물의 형태를 봤지만 어쩌면 우리가 봤던 것은 그 건물이 만들어낸 여백, 빈 공간인지도 모른다. 여백을 통해 대자연 속으로 나를 확장하는 공간. 그렇게 시선이 확장될 때, 그 공간은 길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 발목을 담그자,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 '만족'스럽다.

글=이은임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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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영,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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