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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국채의연금 수합사무소(수창회사) 터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
'대구군에서 국채보상 단연금 모집을 하는 일에 대해 연설회를 열었는데, 일반 인민이 각기 의무로 몇십 원·몇십 전씩 기부하는데, 백정 김창녕씨가 20원을 내고, 두 발 병신인 걸인이 엽전 5냥을 대구군 수전소에 헌납하고 즉시 담뱃대를 파쇄하고 돌아가니, 지켜보던 인사들이 일층 감흥하여 부녀들은 은지환과 장도까지라도 모두 아울러 풀어 바친다더라.'
'대구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그 고을의 퇴기 앵무씨가 지화 100환을 가지고 국채보상 수금소에 와서 서상돈·김윤란·정재학씨를 보고 말하기 를 저는 본래 천인인데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의무로 국채 1천300만 환에 대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의연금을 낼 터인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수가 없어서 백 환을 내었사옵니다.'
이 글은 1907년 3월1일과 3월26일 황성신문에 실린 기사다. 이 내용으로 보아 당시 대구 군민들은 국채보상금을 수합하는 사무소인 '수전소'와'수금소'에 찾아와 의연금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전하면서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주된 장소, 국채보상운동 기간 중 대구 군민들이 끊임없이 찾았던 국채의연금 수합사무소는 왜 아무런 표시가 없는가 ?"
지난 2월21일은 대구 시민주간이 시작된 날이었다. 또한 1907년 2월21일 국채보상운동 전담단체인 '대구단연상채회(大邱斷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 議所)'가 출발한 날이자 최초의 국채보상운동 대중집회인 대구 군민대회가 북후정에서 개최된 날이었고, 대한 매일신보에 '국채 일천삼백만 원 보상 취지'가 보도된 날이었다.
역사적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근대역사관에서는 역사문화강좌를 개설하여 이문기 교수를 초빙했다. 이날 이 명예교수는 국채의연금 수합 사무소는 수창회사였으며 그 위치는 현재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23번지(현재 대덕하이츠 자리)라고 전했다.
그리고 지난 2월28일 신형석 박물관운영본부장이 직접 설명하는 '대구 도심에서 만나는 국채 보상 운동과 2·28 민주운동' 현장답사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을 발의했던 광문사 터도 동판으로 인도 바닥에 표시되어 있었고, 국채보상운동 대중집회가 열렸던 장소인 북후정도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채보상 시작단계인 1907년 1월부터 퇴조기인 그해 11월까지 대구 군민들이 찾아와서 의연금을 냈던 수합 사무소의 위치는 아무런 표시 가 없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지하에도 국채지원금 수합 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의연금을 내는 사람들의 조형물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국채보상운동 유적 약도에도 마찬가지로 수합 사무소의 위치는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지 118년이 지난 지금, 발상지인 대구에서는 의연금을 들고 찾았던 수합 사무소의 위치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글·사진=박태칠 시민기자 palgongsan72@kakao.com
'대구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그 고을의 퇴기 앵무씨가 지화 100환을 가지고 국채보상 수금소에 와서 서상돈·김윤란·정재학씨를 보고 말하기 를 저는 본래 천인인데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의무로 국채 1천300만 환에 대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의연금을 낼 터인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수가 없어서 백 환을 내었사옵니다.'
이 글은 1907년 3월1일과 3월26일 황성신문에 실린 기사다. 이 내용으로 보아 당시 대구 군민들은 국채보상금을 수합하는 사무소인 '수전소'와'수금소'에 찾아와 의연금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전하면서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주된 장소, 국채보상운동 기간 중 대구 군민들이 끊임없이 찾았던 국채의연금 수합사무소는 왜 아무런 표시가 없는가 ?"
지난 2월21일은 대구 시민주간이 시작된 날이었다. 또한 1907년 2월21일 국채보상운동 전담단체인 '대구단연상채회(大邱斷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 議所)'가 출발한 날이자 최초의 국채보상운동 대중집회인 대구 군민대회가 북후정에서 개최된 날이었고, 대한 매일신보에 '국채 일천삼백만 원 보상 취지'가 보도된 날이었다.
역사적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근대역사관에서는 역사문화강좌를 개설하여 이문기 교수를 초빙했다. 이날 이 명예교수는 국채의연금 수합 사무소는 수창회사였으며 그 위치는 현재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23번지(현재 대덕하이츠 자리)라고 전했다.
그리고 지난 2월28일 신형석 박물관운영본부장이 직접 설명하는 '대구 도심에서 만나는 국채 보상 운동과 2·28 민주운동' 현장답사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을 발의했던 광문사 터도 동판으로 인도 바닥에 표시되어 있었고, 국채보상운동 대중집회가 열렸던 장소인 북후정도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채보상 시작단계인 1907년 1월부터 퇴조기인 그해 11월까지 대구 군민들이 찾아와서 의연금을 냈던 수합 사무소의 위치는 아무런 표시 가 없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지하에도 국채지원금 수합 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의연금을 내는 사람들의 조형물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국채보상운동 유적 약도에도 마찬가지로 수합 사무소의 위치는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지 118년이 지난 지금, 발상지인 대구에서는 의연금을 들고 찾았던 수합 사무소의 위치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글·사진=박태칠 시민기자 palgongsan72@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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