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북마을 입구. 어계(魚溪) 조려(趙旅)의 호를 따서 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북마을 어계에는 우물이 두어 개 있다. 마을 뒷산이 자혜롭게도 시냇물과 지하수를 나란히 선물한 모양이다. 우물이 언제 생겼는지는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원북마을 입구에서부터 벽화를 입고 산뜻해진 집들이 개울을 따라 이어진다. 곳곳에 탐나는 반석이 넉넉해 물이 맑았다면 갓끈을 씻을 만 할 텐데, 소리 없는 수면에 녹조가 짙다. 조금 오르자 약한 물소리가 들리고 맑은 물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회관 앞 개울가 큰 느티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다시 조금 더 오르면 개울가 느티나무 아래 콘크리트 사각 정자와 또 우물이 있다. 우물 기둥에 파란 바가지가 걸려 있으니 분명 사용 중인 우물이겠다. 마을 뒷산이 자혜롭게도 시냇물과 지하수를 나란히 선물한 모양이다. 이 개울은 낙동강 수계인 원북천이다. 사람들은 어계(魚溪) 조려(趙旅)의 호를 따서 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계 조려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어계고택은 조려선생이 낙향했을 때 지냈다는 집이다.
◆ 원북마을 어계고택
어계 조려는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 중일 때는 수시로 찾아뵈었다고 한다. 단종이 금부도사의 사약을 받았을 때 그는 급히 청령포로 달려갔다. 그러나 물가에 배가 없었고, 통곡을 하는 그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 등에 업어 건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천 따라 500m 쯤 올라가면 조려선생이 낙향했을 때 지냈다는 어계고택이 있다. 담장너머 훌쩍 솟구친 은행나무가 머리를 풀어헤친 듯 괴괴하다. 500년 된 나무라니 거의 신선이라 할 만하다. 솟을대문은 아담하고 수수하지만 고상하고 바르다. 대문에 문 이름이 아닌 '충신증이조참판조려지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훗날 그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는 의미다.
어계고택은 대문채와 원북재라 불리는 재실, 그리고 조려와 그의 부인을 모신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북재에 '금은유풍(琴隱遺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은(琴隱)은 조려의 할아버지인 조열(趙悅)의 호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공조전서를 지낸 인물로 거문고와 그림에 뛰어나 당대에 이름난 금화가(琴畵家)로 불렸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궁궐의 낙성연에 그를 불러 연주를 청했다. 그러자 조열은 '수대로 왕씨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어찌 이씨 왕과 함께 즐기겠냐'며 완강히 사양했다고 한다. 당시 황희와 권근이 그의 절개를 꺾을 수 없으니 공경하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금은유풍'이다. 금은의 절개를 길이 남기자는 의미다. 근래 주변을 정비했는지 고직사도 새것이고 집 앞 주차장이 엄청 넓다. 마을 깊은 자리 하늘만 가득한 동공 같아 사방에서 새소리 울린다. 뻐꾸기가 울고, 까마귀와 산솔새도 운다.

채미정. 어계 조려는 단종의 승하 후 3년 상을 치르고 이곳에서 독서와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정자 옆 층층암벽은 청풍대, 대 위에 문풍루가 올라서 있다.
◆ 채미정
원북마을 입구 도로가에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도로에서 살짝 내려앉았으나 반듯한 땅이고, 마을 깊은 곳에서 어계고택 앞을 지나 흘러온 원북천이 휘돌아 나가는 땅이다. 정자는 흙돌담을 두르고 무지개다리가 놓인 작은 연못까지 거느리고 있다. 어계 선생은 단종 승하 후 3년 상을 치르고 이곳에서 독서와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옛날에는 천을 건너 정문을 지나 연못의 무지개다리를 건너 채미정에 다다랐다고 한다. 지금은 옆문이 있지만, 옛 사람처럼 정문 방향의 트인 공간으로 들어선다. 고즈넉한 정취에 폭 싸인다. 정자는 생각보다 크고, 단청도 없이 화려한 기품을 풍긴다. 뒤뜰에는 꽝꽝나무 몇 그루가 푸르고 보리수 한그루가 보석처럼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3천여 년 전에 중국을 지배한 것은 은(殷)나라였다. 상(商)나라라 부르기도 한다. 은나라 주왕이 달기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면서 타락하여 폭군이 되자, 제후국인 주나라 무왕은 주왕을 토멸하고 주 왕조를 세웠다. 백이와 숙제는 본래 상나라 변방의 작은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형제는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나물과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한다. 채미정에 백세(百世)와 청풍(淸風) 현판이 걸려 있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매운 선비의 절개'를 뜻한다. 정자 옆 층층암벽은 청풍대(淸風臺)다. 대 위에는 문풍루(聞風樓)가 올라서 있다. 맑은 바람이 부는 대에 바람소리를 듣는 누각이다.

조려와 생육신을 모신 서산서원. '서산'은 백이와 숙제가 지은 '채미가'의 첫 구절인 '저 서산에 올라 산 중의 고사리나 캐자'에서 따온 것이다. 서산은 곧 수양산이다.
◆ 서산서원
원북마을 동구에는 조려와 생육신을 모신 서산서원이 있다. 조선 숙종 때인 1703년에 세워져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서산서원의 원래 터는 마을 안에 남아 있는 원동재로 추정된다.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다 1984년에 조려 선생의 후손들이 사우, 강당, 재료, 문 등을 빠짐없이 갖추어 복원했다. 왕복2차선 도로 바로 옆에 홍살문이 서 있다. 그 너머에 돌 무지개다리가 놓인 사각의 연지가 있고 또 그 너머에 솟을삼문이 '숭의문' 현판을 달고 있다. 채미정과 진입 형식이 비슷하다. 경내는 넓고 쓸쓸하다. 여섯 개의 거북 머리가 사방으로 향한 비좌 위에 생육신 사적비가 서 있다. 거북을 보는 마음이 500년 된 은행나무 보는 듯하다. '서산'은 백이와 숙제가 지은 '채미가'의 첫 구절인 '저 서산에 올라 산 중의 고사리나 캐자'에서 따온 것이다. 서산은 곧 수양산이다.

왼쪽은 어계 선생의 5세손인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의 쌍절각, 오른쪽은 조열 선생의 신도비각이다.

서산서원의 원래 터는 마을 안에 남아 있는 원동재로 추정된다.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리라 여겨진다.
서원 옆 길가에 두 개의 비각이 꽃과 수목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는 금은 조열 선생의 신도비각고, 또 하나는 어계 선생의 5세손인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의 쌍절각이다. 조종도는 정유재란 때 함양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인 전의이씨는 자결했다. 강직한 집안 내력이다. 동쪽 들 너머 곧게 뻗은 경전선이 보인다. 원래는 채미정 앞을 휘도는 물길 바로 옆으로 철길이 놓여 있었고 남쪽으로 약 250m 아래에 원북역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세운 간이역이었고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원북마을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었다고 한다. 역사는 2013년 철거되었고 옛 철길이 있던 자리는 지금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공사장이다. 경전선 위로 두 개의 봉우리가 봉긋하다. 숙종이 높은 봉우리를 백이산이라 하명하자 옆 봉우리는 자연스럽게 숙제봉이 되었다고 한다. 사육신인 성삼문은 형제를 질타했었다.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 캐기라도 하는 것인가. 비록 자연의 들에 있는 것인들 그것이 누구의 땅에 난 것인가." 백이와 숙제는 수천 년이 지나도록 자신들이 호명되리라 생각했을까. 누군가에게는 숭앙의 대상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질타의 대상으로. 변하는 세상과 살아가는 일이 모두 화두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방향으로 가다 칠원분기점에서 진주, 함안 방면 10번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장지IC에서 내려 톨게이트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 안도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 군북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한다. 약 3.5㎞ 가면 오른쪽에 서산서원이 자리하고 1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에 원북마을 표석이 있는 마을입구, 왼편에 채미정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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