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 대구 달성군 현풍읍 달성군민체육센터에서 '참좋은 일자리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올해 행사에선 처음으로 고려인 고용 지원의 장이 마련돼 고려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승엽기자sylee@yeongnam.com
12일 오후 2시쯤 '참좋은 일자리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린 대구 달성군 달성군민체육센터. 바쁘게 움직이는 구직자들 사이로 생소한 러시아어가 들려왔다. 일제의 핍박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했다가 또 다시 옛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 후손들의 목소리였다. 이날 행사는 지역에 정착한 고려인들에게 취업의 장을 열어주기 위해 달성군과 달성1차공단이 협약까지 맺으면서 지원했지만, 언어조차 원활하지 않은 이들에겐 벅차 보였다. 2016년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 박타티아나(여·47)씨는 "그동안 쭉 야간 근무만 해서 주간 일자리를 찾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았지만, 고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강제 이주 당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국내 정착은 여전히 쉽지 않다. 불안정한 신분과 언어적 문제 등으로 사회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아픔과 애환을 보듬을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12일 영남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정착 고려인 수는 약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날 행사가 열린 달성군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1천400명으로, 그 중 1천200여명이 달성1차산업단지가 위치한 논공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언어적 문제로 단순 생산직에 종사하고 있다.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한국어를 쓰는 고려인은 드물다. 2018년 카자흐스탄에서 네 가족과 함께 건너온 이일레나(여·54)씨는 "한국어가 부족한 탓에 구직 정보 탐색은 물론, 실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 출입국사무소에 통보해야 하는데, 이를 러시아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벌금을 낼 뻔 했다"고 털어놨다.
비자 문제는 이들의 정착을 막는 현실적인 장벽이다. 정부는 2004년부터 고려인들에게 구직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재외동포(F-4)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고려인의 외국인 가족(배우자 등)에게는 F-1(유학생) 비자만 발급돼 구직 활동이 원천봉쇄돼 있는 게 현실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가족 부양에 허덕이다 고국을 다시 등지는 고려인들이 적지 않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박다마라(여·43)씨는 "남편이 외국 사람이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이러다 보니 영주권을 획득하고 싶어도 연소득 조건(약 9천만원 이상)에 걸리게 된다"며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떠나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인 장벽들이 이를 힘들게 한다"고 답답해 했다.
부족한 생활 인프라 문제도 정착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박씨는 "중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 중학생 이상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원 기관이 없다. 수영 등 취미 활동도 어렵다"며 "고려인을 위한 커뮤니티나 지원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늘어나는 고려인들의 정착 및 지원 문제는 지자체들의 숙제다. 그런 면에서 달성군은 대구 9개 구·군 중 가장 앞서가고 있다. 군은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달성군-산업단지공단-기업의 삼각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고려인 고용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날 참좋은 일자리 만남의 날 행사에 고려인을 위한 채용의 장이 열린 게 그 첫걸음이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달성군은 고려인 동포들이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분야별 다양한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관내 기업과 고려인 고용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이달 중 지역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러시아어 생활정보지를 배포할 예정"이라며 "향후 논공읍에 글로벌센터를 개소해 고려인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승엽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