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여성의류 쇼핑몰 애니원모어 매장. 조현희기자
의류패션학을 공부한 정모(여·26)씨는 요즘 동성로를 걸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패션이 있다. 스트링, 프릴 등 섬세한 디테일이 더해진 블라우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플리츠 스커트, 니삭스, 통굽 단화…. 바로 일본풍 스타일이다. 김씨는 "예전에는 개성이 강한 일부 패션 마니아만 즐기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즘은 10~20대뿐 아니라 30대 초반까지도 부담 없이 입는 것 같다"며 "여성 의류 플랫폼에서도 요즘 이런 스타일의 옷들이 알고리즘에 자주 뜬다"고 말했다.
'J-패션'이 뜨고 있다. 그간 일본 패션은 소수의 소비자가 즐기는 마이너한 패션으로 여겨졌다. 지금은 과거보다 대중화돼 일본풍 스타일을 정체성으로 내세운 브랜드들도 등장한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감성 패션'으로 통하며 인기다. 그런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 패션 브랜드들이 입지를 넓히는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무신사 대구 내 '미세키서울' 매대. 마네킹에 일본풍 하얀 블라우스와 차콜색 플리츠 미니 원피스가 걸려 있다. 조현희기자

브랜드 코이세이오의 가디건을 입은 그룹 뉴진스의 해린. <뉴진스 공식 인스타그램>
지난 5일 국내 최대 규모의 온라인 편집숍 '무신사'의 대구점을 찾았다. 매장 2층 한쪽에서 여성 고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공간은 '미세키서울(Miseki Seoul)'이었다. 에프컴바인의 김건주 대표가 2023년 F/W 시즌을 시작으로 일본인 패션 디자이너 미세키 레이의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매대 위에는 블랙·화이트·그레이 톤의 액세서리 잡화들이 놓여 있었다. 마네킹에는 하얀 블라우스에 차콜색 플리츠 미니 원피스가 걸려 있었는데, 마치 일본 잡지 속 '걸리시 룩(girlish look)'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렇듯 '일본 감성'을 전면으로 내세운 브랜드들이 인기다. 최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코이세이오, 오헤시오, 애니원모어 등은 일본 특유의 감성을 녹여낸 감각적인 스타일의 컬렉션을 제안하는 것이 특징이다. 신생 브랜드임에도 한섬 EQL, 29㎝ 등 주요 패션 플랫폼뿐만 아니라 백화점에까지 입점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 에비뉴엘에서 열린 빔스 팝업 스토어의 대표 이미지. <롯데백화점 제공>
◆현지 브랜드들 한국 진출…日서는 'K-패션' 유행
J-패션의 유행은 여성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별을 아우르는 대중적인 일본 브랜드들이 한국에 잇달아 진출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지난 4월 '오픈런' 행렬이 이어진 '빔스(BEAMS)'가 대표적이다. 1976년 도쿄 하라주쿠에서 시작한 일본 대표 편집숍이자 패션 브랜드다. 빔스는 이달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에서 한국 첫 팝업 스토어를 열었는데, 첫날부터 오픈런 행렬이 이어졌다.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고객의 이목을 끌어 개장 3시간 전부터 대기열이 길게 늘어섰다.
일본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언더커버(UNDERCOVER)'와 'Y3'도 각각 오는 28일, 29일 더현대 서울에 국내 첫 매장을 연다. 2019년 노재팬 운동 후 문을 닫은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의 동성로점도 지난 5월 2천616㎡(791평) 규모로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오픈한 마뗑킴 시부야점 매장 앞에서 일본 고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하고하우스 제공>

마뗑킴이 일본에 처음 선보이는 매장 '마뗑킴 시부야점'을 찾은 일본인 고객들. <무신사 제공>
한편 일본에서는 'K-패션'이 뜨고 있다. 최근 일본 패션 시장에서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빠르게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하고하우스의 투자 브랜드 '마뗑킴'은 지난 4월 도쿄 시부야의 랜드마크인 '미야시타 파크'에 일본 1호 매장을 냈다. 유통은 무신사가 맡았다. 오픈 첫날 하루 동안 1천명이 넘게 방문했다. 무신사, 에이블리 등 온라인 플랫폼들도 글로벌 온라인 판매 플랫폼을 론칭하면서 일본에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무신사 글로벌의 일본 거래액은 올해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114% 증가했다.
일본에서 K-패션이 뜨면서 한국 패션의 성지 서울 성수동은 이미 일본인 관광객들의 '여행 필수 코스'가 됐다. 일부 매장은 일본어 응대가 가능한 직원을 따로 배치할 정도다. 무신사 대구에도 한국어·영어와 함께 일본어 안내판이 매장 곳곳에 자리한다.

무신사 대구 내 브랜드 안내판. 한국어·영어와 함께 일본어도 적혀 있다. 조현희기자

일본 '패션의 성지'로 불리는 도쿄 하라주쿠. 하라주쿠 내 소규모 부티크, 대형 글로벌 브랜드 점포 등 다양한 가게가 즐비한 캣 스트리트다.
◆엔저·콘텐츠…여행과 OTT가 키운 소비
이처럼 한국에서는 J-패션이, 일본에서는 K-패션이 유행하는 대조적인 양상은 여러 원인으로 풀이된다. 먼저 엔저의 장기화와 여행 트렌드다. 팬데믹 이후 엔저로 일본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이 늘었다. 현지에서 쇼핑 시 과거에는 면세점에서 해외 명품을 주로 구매했다면, 최근에는 자국에서 보기 힘든 현지 브랜드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도쿄의 하라주쿠나 시부야, 신주쿠 같은 번화가에서는 스타일 좋은 일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최근 많은 여행객이 이런 모습을 직접 접하며 일본 패션에 매력을 느낀 듯하다"며 "현지에서 일본 브랜드 상품을 구매하는 경향도 뚜렷한데,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소성과 일본 특유의 디자인이 결합되고 엔저 영향으로 가격 부담이 줄면서 더욱 소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아직 오프라인 중심 유통구조가 강세"라고 덧붙였다.

미세키서울의 2024 여름 컬렉션 룩북 이미지. 도쿄에서 산책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담아냈다. <미세키서울 제공>
또 하나의 이유는 콘텐츠 접근성이다. 국제 플랫폼,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일본 영화 및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콘텐츠 속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다보니 이를 소비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 일본 드라마 속 교복 스타일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코디 등을 따라하는 식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분석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기존에는 양국 과거사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문화 교류가 저해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문화라는 건 원래 흐르기 때문에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며 "인적 교류가 워낙 활발하고, 한국과 일본 모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라 상대국 국민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적인 플랫폼이 많아지고, 여기에 OTT까지 생기면서 상대국의 콘텐츠를 손쉽게 접하게 돼 자연스럽게 문화적 친밀감이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