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전광석화’ 좋아하면 골병든다

  •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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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23 06:00  |  발행일 2025-09-22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최근 정치권에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사자성어가 유행이다. 전광석화는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거리는 것과 같이 매우 짧은 시간이나 매우 재빠른 움직임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전광석화를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정치인은 단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청래다.


정청래의 전광석화 타령은 그가 민주당의 당권 도전에 나선 지난 6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6월24일 밤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표가 되면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은 3개월 안에 전광석화처럼 해치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6월29일 친명 조직인 더민주전국혁신회의에선 "(경쟁자인) 박찬대 의원은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 개혁을 추석 밥상 때까지 한다 했는데, 저는 추석 때 고향 갈 때 뉴스에 검찰청 폐지 소식이 들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폭풍처럼 몰아쳐서 전광석화처럼 3개월 안에 해치우겠다"고 했다.


7월19일 충청권 권리당원 투표에서 정청래가 62.77%의 득표율로 37.23%를 득표한 박찬대를 큰 차이로 누르자 언론은 정청래의 '전광석화 개혁' 전략의 승리로 해석했다. 정청래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7월28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선 "(검찰 개혁은) 최단 기간 일주일이면 가능하고, 늦어도 한 달 안에 가능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8월2일 정청래는 최종 득표율 61.74%로 경쟁자인 박찬대(38.26%)를 23.48%포인트 차로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됐다. 그는 당대표 수락 연설과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인 전광석화 메시지와 더불어 "지금은 내란과의 전쟁 중이라 여야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국민의힘에 대해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여권 내에서조차 전광석화 속도에 대한 이의 제기가 나오자 정청래는 8월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개혁의 시기를 놓치면 반드시 반개혁의 저항이 제2의 밀물처럼 밀려온다. 실망한 지지자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그래서 내가 폭풍처럼 몰아쳐서 전광석화처럼 해치우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혁은 속도가 생명인 전쟁과 다를 게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다. 정치를 전쟁처럼 여기면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부르짖은 건 군사독재정권인데, 어찌하여 군사독재정권을 증오하던 운동권 출신의 정청래가 속전속결보다 훨씬 빠른 전광석화를 찬양하는가? 싸우면서 닮아간 건가? 아니면 속전속결과 전광석화는 시대와 정권을 초월한 한국인 특유의 DNA인가? 어떤 게 맞건 시대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불가피하거나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선진국이라고 뻐기면서 산업재해와 졸속 입법의 폐해가 매우 큰데도 그 원인이라 할 전광석화를 외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혹 전광석화가 팬덤정치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일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전광석화의 원조가 대통령 이재명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20년 4월17일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은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마지막 방송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코로나19 과정에서 신속하고 전광석화 같은 일처리, 단호함으로 매력을 샀다"고 했다. 사실 이재명 지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재명의 스타일 중 하나는 바로 전광석화다. 예컨대, 백승대는 '이재명, 한다면 한다'라는 책에 "이재명의 전광석화 같은 이만희 교주에 대한 체포 시도와, 신천지 교인들의 전수검사 실시는 이재명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 되었다"며 "이로 인해 이재명의 실행력에 대한 신뢰가 확산되었다"고 썼다.


이재명은 지금의 정청래처럼 전광석화를 자주 입에 올리진 않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행동으로 전광석화를 보여주곤 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자세 전환마저 그런 식이었다. 그는 2021년 6월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해 "필요한지 공감이 안간다"며 '속도조절론'을 내비쳤다가 "검찰개혁 의지가 있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가 7월15일 전 국무총리 한명숙 사건에 대한 법무부 감찰결과가 나오자 "검찰개혁을 지지부진하게 두지 않겠다. 전광석화처럼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이 모든 면에서 다 전광석화를 실천한 건 아니었다. 강성 지지자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은 전광석화지만, 그들이 원치 않거나 무관심한 일은 일처리를 자꾸 미루는 지지부진(遲遲不進)으로 대응했다. 예컨대, 특검 추천은 전광석화처럼 했지만, 대선 공약이었던 대통령실 특별감찰관 임명 논의는 감감무소식이다(동아일보 8월26일자).


전광석화와 같은 일처리는 화끈하고 후련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좋은 점 못지 않게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속도를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게 바로 안전이다. 잘못된 판단이거나 디테일이 엉망이면 어찌할 것인가? 속도가 생명인 일이 있고, 속도보다는 용의주도한 점검이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이게 전광석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여권의 전광석화는 지지자들의 흥분을 유지시키려는 정파적 이익에 종속된 '선택적 전광석화'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3대 특검 수사 기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여야 원내대표 합의를 파기한 지난 9·11 사건은 어떤가. 강성 지지자들은 특검을 빨리 끝내는 전광석화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이 아끼는 정청래일지라도 이 기본 원칙에서 이탈하면 한 방에 날아갈 수 있다. 이게 바로 그 기세등등했던 정청래가 '부덕의 소치' 운운하면서 몸을 낮춘 이유였을 게다.


아직까진 여권의 전광석화 질주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없다. 윤석열 일당이 '계엄 자폭'이라는 워낙 큰 죄를 저지른 데다 국민의힘이 그런 윤석열과의 단절을 거부하는 제2의 자폭을 저지른 탓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전광석화가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 '전광석화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긴 44년 전의 유물로만 알았던 계엄령이 버젓이 살아서 나타난 시대착오가 저질러지는 현실이고 보면 전광석화가 다시 환영받지 말란 법은 없겠다. 하지만 전광석화 좋아하면 겉은 멀쩡해 보여도 골병들기 쉽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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