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요즘 노인들에게도 AI(인공지능)는 대세다. 손주 이름을 'AI 사주풀이'로 짓고 아이를 위한 시(詩), 곡(曲)까지 AI와 상의해 만든 노인이 있을 정도다. 자식이나 친구한테 털어놓기 힘든 고민도 AI에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답변에 위안을 얻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고 한다. 시판 중인 어느 AI 돌봄 로봇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상과 복약, 아침체조 등을 챙겨주고 혈압·혈당·심박수는 물론 기분까지 신경 써 웬만한 동반자 역할을 한 지 오래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 주문 따라 척척 생산
그 AI를 손바닥 놀리듯 활용하는 한 노인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추석날 한자리 모일 가족들에게 할아버지가 해줄 재밌고 교훈적인 얘기를 만들어줘." 주문을 넣자 AI는 금세 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달나라 토끼와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 얘기였다. "동화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라고 했더니 새로 할아버지, 아들, 손주 3세대의 명절 생각이 각각 달라 갈등 빚는 얘기를 만들어냈다. 이번엔 사실감 부족을 지적하자 가족 모두가 '행복한 명절 보내기 리스트'를 쓰고, 돌려 읽어 결국 세대 간 다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결말로 바꿔줬다.
새 주문을 넣으면 AI는 바로바로 다른 얘기를 만들어냈다. 다만 처음 낸 이야기도 그렇지만 다른 주문이 첨부된 새 이야기 역시 감흥이 크게 높아지진 않았다. 어디선가 보고 들었음 직한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열댓 번 주문을 바꿨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요구를 넣어봤다. "할아버지가 청년이었던 1970년대 생활상을 담은, 예를 들자면 이범선의 '표구된 휴지'처럼 가족 사랑이 담긴 이야기를 만들어줘." 이번 대입 수능 모의평가에 그 소설이 출제된 걸 기억해 던진 주문이었다. 그 답이 흥미로웠다.
"좋습니다. 이범선의 소설 '표구된 휴지'는 내용은 짧지만 울림이 큰 작품입니다. 6월 국어 모평에도 출제되었죠." 여기까지는 만점, 그러나 이어진 내용은 엉뚱했다. "힘들게 살던 청년이 어느 날 휴지를 발견해 펴봤더니 팽개쳐놓은 시골 아버지 편지였다. 몸은 성하냐, 밥 잘 챙겨 먹어라 같은 소박한 당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눈물이 난 청년은 휴지를 표구해 방에 걸었다. 볼 때마다 가족 사랑, 고향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원작과는 구성 내용이 사뭇 다른 얘기였다. 맛과 멋, 감동과 재미도 덜했다. 원작소설을 꼼꼼히 읽고 새로 써줄 걸 요구했다. 그러나 AI 고집(?)도 대단했다. 구성은 그냥 둔 채 딴 살만 붙인 얘기를 계속 내놨다. 심지어 70년대엔 물자가 부족해 화장지마저 표구했다는 말 같잖은 이야기도 했다.
# '국보급', 창호지에 먹 편지
"-니무슨주변에고기묵건나. 콩나물무거라. 참기름이나마니처서무그라"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무시한 암호 같은 이 글은 이범선이 1972년에 발표한 단편 '표구된 휴지'의 첫 문장이다. '네 처지에 고기반찬을 어찌 먹겠느냐, 그저 콩나물이라도 참기름 많이 쳐서 먹어' 영양을 취하고 몸을 살피라는 뜻일 터다. 단순 투박하지만 바로 옆에 앉아서 조곤조곤 당부하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돼온다. 여기에 바로 다음 문장 "누렇게 뜬 창호지에다 먹으로 쓴 편지의 일절이다"까지 읽고 나면, 작가가 여섯 쪽에 불과한 이 짧은 소설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풀어가려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1970년대 가을 어느 날. 화가인 나에게 은행 지점장인가 대리인가 하는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휴지를 표구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뭔데, 그림인가?" "글쎄 펴보게. 그림이라면 그림이고 글이라면 글인데, 그게… 국보급이야." 꼬챙이에 먹을 찍어 그린 것 같은 글자들이 구겨진 창호지 위에 아무렇게나 눕고 선 편지였다. 친구는 매일 은행에 푼돈을 저금하러 오던 지게꾼 청년이 동전을 싸 왔다 얼결에 두고 간 것이라 했다. 시골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꾹꾹 눌러쓴 듯한데 어렵게 '해독하면' "뭔가 뭉클한, 바가지에 담아 내놓은 옥수수 냄새" 같은 게 나는 글이었다.
"-니떠나고메칠안이서송아지낫다. 그너석눈도큰게 잘자란다. 애비보다제에미를더달맛다고덜한다." 소설의 맨 앞뒤와 중간중간 장면을 바꿀 때마다 작가는 편지 글귀를 배치했다. 글자는 삐뚤빼뚤 크고 작고, 진하고 연하고, 제멋대로다. "-압논벼는전에만하다. 뒷밧콩은전해만못하다. 병정갓던덕이돌아왔다. 니서울돈벌레갓다니까 소우숨하더라." "-우물집할머니하루알고갔다. 모두잘갓다한다. 장손이장가갓다. 색씨는너머마을곰보영감딸이다. 구장네탄실이시집간다. 신랑은읍의서기라더라. 앞집순이가어제저녁감자살마치마에가려들고왔더라. 순이는시집안갈끼라하더라. 니는빨리장가안들어야건나." 그리고 소설의 맨 끝 문장. "-돈조타. 그러나너거엄마는돈보다도너가더조타한다. 밥묵고배아프면소금한줌무그라하더라." "-밤에는솟적다솟적다하며새는운다마는…"
화가가 이 휴지 아닌 휴지를 표구점에 맡긴 사이 은행원 친구는 외국으로 발령 나 출국했다. 화가는 결국 자기 화실에 그걸 걸어놓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액자가 '국보급' 마냥 화실의 중심점이 됐다. "그건 그림 같기도 하고 글 같기도 하다. 아니 그건 분명 그 둘이 합쳐진 것이었다." 화실의 중심, 액자를 간간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화가는 차츰 그 친구가 이 휴지 같은 편지를 무슨 보물인 양 싸 와 표구해달라던 심정을 느껴 알 것 같았다.
# AI가 못 읽는 감정선
물론 축약한 이 내용은 원작의 감흥을 반의반도 못 살린다. 특히 편지 글귀 하나하나가 주는 웃음 사랑 이웃 자연과 그리움, 정(情), 삶을 온전히 전달키엔 역부족이다. 그러고 보니 AI는 원작에 충실한 얘기를 만들어달라는 잇단 주문에도 편지 글귀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면 맞춤법 띄어쓰기도 무시한 그것들이 소설의 본류가 아니라고 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AI에 "병정갓던덕이돌아왔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병정같이 단단하던 떡이 다시 돌아왔다"란 괴상한 답이 돌아왔다. 몇 번 되묻자 AI는 "'표구된 휴지'는 글씨나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 깃든 정성 기억 시간이 핵심"이라며 "실제 의미는 사라진 채 형식만 남은 글"이라고 했다.
그랬다. 아직 AI는 문학 속 세밀한 감정선까지 읽고 살피며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년에는 그런 점까지 보완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AI가 나와 온 가족 앞에서 감동적 추석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른다. 그러니 올해, 이 길고 긴 추석 연휴엔 표구된 휴지 같은 짧은 옛 소설들을 골라 읽고 마음을 씻어보면 좋겠다. 사라진 풍경, '솟적다솟적다'하며 밤새 우는 새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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