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길 너머 단정한 담장 위로 독락당 지붕과 눈이 마주친다. 그 곁에는 별서정자인 계정이 한발을 성큼 내어 계곡의 너럭바위에 올라서있다.
노릇한 옥산들을 가로질러 자옥산(紫玉山)과 어래산(魚來山) 사이 골짜기 마을로 향한다. 마을은 옥산, 자옥산 아래라 그리 불렀다 한다. 옥산3리 중보마을을 멀찍이 바라본다. 홀연 들 가운데 독야(獨也)한 소나무가 청청하지 못하여 안타깝다. 지글들과 새터들을 지나 곡구(谷口)에 다다르자 생기롭게 일렁이는 솔숲이 지나간 마음을 지운다. 이들은 분명 동문(洞門)을 지키는 수문장들 일 터. 문 너머는 옥산2리, 옥산서원이 있는 서원마을이다.

옥산천변의 옥산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고, 현대에는 2010년과 1019년 두 번이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변루 누하를 조용히 통과해 큼직한 청석을 디뎌 밟고 강당인 구인당을 마주한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고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다.

강당과 동 서재, 무변루의 처마가 거의 붙어 있어 외부로 향하는 시선들은 막혀있다. 보이는 것은 오롯한 강학의 공간과 무변루 지붕 위로 솟은 자옥산 뿐이다.
◆ 옥산서원
지극히 아름다운 것들이 나를 보고 있다. 그들은 소나무, 회화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등 다양한 노거수들이다. 그들의 차분하고 풍부한 숨과 부드럽고 울창한 그늘에 젖은 길이 옥산천을 따라 이어진다. 옥산천은 어래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형산강의 지류인 칠평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유로연장 7.5㎞의 짧은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에 옥산천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다 옥산서원 때문이다. 옥산서원은 영남학파의 거두인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곳이다.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이듬해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고, 현대에는 2010년과 2019년 두 번이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줄곧 곧게 흐르던 옥산천이 북쪽으로 슬쩍 굽이진 자리에 옥산서원이 자리한다. 입구는 역락문(亦樂門)이다. 벗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곧장 무변루(無邊樓)가 단호하게 막아선다. 누마루와 누하마저 판문으로 굳게 닫혀 매우 엄중하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무변루 누하를 조용히 통과해 큼직한 청석을 디뎌 밟고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을 마주한다. 그 뒤에 사당이 있고 또 그 곁에 조용히 신도비가 자리한다. 전학후묘의 배치다. 경내를 두루 돌아 구인당 마루에 오른다. 반들반들한 나무의 감촉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강당과 동 서재, 무변루의 처마가 거의 붙어 있어 외부로 향하는 시선들은 막혀있다. '무변'은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풍월무변'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계 없이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롯한 강학의 공간과 무변루 지붕 위로 솟은 자옥산 뿐이다. 유생들의 분주한 버선발이 누마루를 두드리던 어느 날, 무변루는 가슴을 열어 무변의 세계를 보여주었을까.

옥산서원 앞 옥산천이 북쪽으로 슬쩍 굽이져 너르게 펼쳐진 반석이 세심대다.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다.

자세히 살피면 세심대 각자를 찾을 수 있다. 흐려졌으나 크고 반듯한 각자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퇴계는 이언적을 특별히 존경했다.

용추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다리 건너 반석에는 오래전 원래 신도비가 서 있었다는 직사각의 홈이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다.
◆ 사산에 싸여 오대를 더듬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고 '구인당'과 '무변루'의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다. 이 이름들의 무게가 회재 선생을 떠받든다. 이언적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그는 중종9년인 1514년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사간원 사간 시절인 1531년, 그는 중종과 사돈이었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돼 옥산으로 왔다. 그리고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은거했다. 독락당에 앉은 선생은 사방을 휘두르며 산과 봉우리에 이름을 주었다. 북쪽 봉우리는 도덕산, 남쪽의 먼 산은 무학산, 동쪽 봉우리는 화개산, 서쪽 봉우리는 자옥산. 또한 계곡의 다섯 바위를 골라 이름을 주었다.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며 즐기는 관어대, 갓끈을 풀어놓고 바람을 즐기는 탁영대, 마음을 맑게 하는 징심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세심대, 그리고 돌아감을 노래하는 영귀대. 그는 이들을 '사산오대(四山五臺)'라 통칭하고 독락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로 삼았다.
옥산서원 앞 옥산천이 북쪽으로 슬쩍 굽이져 너르게 펼쳐진 반석이 세심대다.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다. 자세히 살피면 세심대 각자를 찾을 수 있다. 흐려졌으나 크고 반듯한 각자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퇴계는 이언적을 특별히 존경했다. 이언적의 행장도 퇴계가 썼다. 청량하고 소쇄하다. 세심대 옆으로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져 용추를 만든다. 용추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다리 건너 반석에는 오래전 원래 신도비가 서 있었다는 직사각의 홈이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다. 옥산천 너머는 사산이 감춰 놓은 넉넉한 들이다. 들을 가르는 오솔길 끝에는 작은 하마비가 서 있다. 과거 선비들은 들을 가로질러 왔을 것이다. 그들은 하마비 앞에 내려서서 신도비에 예를 갖춘 뒤 외나무다리를 건너 세심대에서 마음을 씻고 서원으로 들었을 것이다. 세심대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독락당과 연결이 된다. 현재의 옥산1리 세심마을이다. 어래산 자락을 밟고 독락당에 닿았다가 다시 세심마을을 관통해 옥산서원으로 돌아오는 2.3km의 옥산서원 둘레길이 있다. 사산에 폭 싸여 오대를 더듬어 볼 만한 길이다.

물길 너머 단정한 담장 위로 독락당 지붕과 눈이 마주친다. 그 곁에는 별서정자인 계정이 한발을 성큼 내어 계곡의 너럭바위에 올라서있다.

계정을 떠받들고 있는 넓은 바위가 관어대다. 정자 안에 편액이 작게 보인다. 한석봉의 글씨다.

계정에서 북쪽 상류로 조금 올라오면 세심마을 북쪽 숲 아래 사금파리 같은 징심대가 있다. 마을을 맑게 하는 대다.
◆ 독락당
거대한 은행나무를 지나 티끌 없는 솔숲 오솔길을 너머 무성한 활엽의 숲길 이 이어진다. 말간 도토리가 지천이고, 해변도 아니건만 자줏빛 해변싸리 꽃이 흔하다. 숲길이 계류에 내려서면 크고 잘생긴 흑청색 바윗돌이 줄느런히 길을 연다. 물길 너머 단정한 담장 위로 독락당 지붕과 눈이 마주친다. 그 곁에는 두 칸 정자가 한발을 성큼 내어 계곡의 너럭바위에 올라서있다. 독락당의 별서정자인 계정(溪亭)이다. 정자를 떠받들고 있는 넓은 바위가 관어대다. 계정과 관어대로 느긋이 달려가는 사금파리 같은 계곡이 징심대일 것이다. 탁영과 영귀의 대는 찾지 못하였으나 아쉽지 않다. 돌다리에서, 관어대에서, 세심대와 징심대 어디서든 탁영하고 영귀할 수 있다.
독락당 마당에 열매 맺힌 산수유나무와 향기로운 향나무가 고고하다. 회재 선생은 이곳에서 자연과 벗하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만물이 변화하는 세상이치 고정된 모습 없나니 /내 한 몸 한적하게 때에 따라 살았다 /몇 해째 차츰차츰 애쓰는 맘도 줄어들어 /오래 청산 마주할 뿐 시도 짓지 않는다'는 시도 지었다. 그리고 1537년 김안로가 처형당하자 중앙정치에 복귀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했고, 선생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553년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용한 세심마을 한가운데를 걸어 옥산서원으로 향한다. 감과 모과가 익어간다. 맨드라미와 백일홍 빛깔이 부리부리하다. 오랜만에 보는 꽃사과 앙증맞은 열매가 반갑다. 곳곳에 걸출하게 솟구친 은행나무들이 가을을 기대하게 한다. 20여 년 전, 갑작스런 어둠과 폭우로 서원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날을 떠올린다. 그래, 그날도, 좋았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여행정보
20번 대구포항소고도로 북영천IC로 나가 35번국도 영천방향으로 간다. 오미교차로에서 좌회전해 28번 국도를 타고 약 12㎞ 직진, 옥산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3㎞ 정도 들어가면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독락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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