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교과서’와 ‘법’

  •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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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22 06:00  |  발행일 2025-10-21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교과서에 나와 있다.' 이 한마디면 논쟁을 끝낼 수 있었다. 교과서는 단순한 학습 자료가 아니었다. 절대적 귄위가 있었다.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이자, 사회가 공유하는 지식의 정본이었다. 판단의 기준이며 학문의 표준 해설서였다. 공신력 있는 정답이 수록된 규범집이었다. 스포츠 중계에서 '스윙 교과서네요'라면, 선수의 자세가 완벽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본받아도 된다는 전형성까지 내포했다. 교과서는 단순한 책을 넘어 규범과 기준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교과서'의 의미가 달라졌다. 세상이 바뀌면서 획일성에 대한 비판, 다양성 존중 요구, 교육 자율성 추구 등과 맞물려, 검정 교과서 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여러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검정 교과서는 기본적인 교육과정과 검정 기준을 따르고 있지만, 집필자의 철학과 관점에 따라 설명의 방식, 서술의 톤, 예시가 다르다. 동일한 사실도 다르게 해석되고 기술된다. 그러니 더 이상 교과서가 '지식의 정본'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절대적 권위도 무너졌다.


교과서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학생들은 획일화된 기준을 배우는 대신 다양한 관점을 접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교과서와 비교·토론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이해가 깊어지고,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기도 한다. 반면 공통의 기준이 무너지면서 교육 현장이 혼란스러워졌다. 교과서마다 기준과 강조점, 내용 해석이 다르다. 더 이상 '교과서'가 논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기준이 다양해진 결과 주장만 넘치고, 수용과 책임은 흐려지는 비정상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자리 잡았다. 결국 불필요한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져 갈등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세상이 되었다.


절대적 권위를 잃은 '법' 역시 유사한 변화를 겪고 있다. '법'은 세상의 모든 갈등을 물 흐르듯 원만하게 해결해 주는 최고 권위의 기준이다.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한 가장 공정하고 정의롭고 합리적인 약속, 규범, 언어다. 억울함을 해소해 주고, 분노를 삭여줄 수 있는 안전망이고, 잘잘못을 명확하게 따져 보상과 응징을 결정짓는 저울이다. 법은 냉혹해도 공정하고, 불편해도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법을 부정하는 사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역사의 법, 양심의 법, 국민의 법이라는 새로운 말도 생겼다. '법'이 '사실'보다 '이해'에 좌우되는 느낌을 주었다. 누가 판단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을 고치고, 해석을 비튼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법'을 만들고, '법'을 다루는 사람도 바꾼다. '법'은 더 이상 중립, 공정, 정의의 저울이 아니다. 공동체의 '안전망' 역할도 하지 못한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이러니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가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예의, 염치, 양심, 도덕을 공적 가치로 회복하거나, 신뢰와 합의에 기반한 문화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 시민이 '법'과 '공동체 규범'의 의미를 배우고 토론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책임 있게 조율하는 경험을 쌓도록 해야 한다. 법을 만드는 과정의 투명성, 정당성을 확보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의 책임성과 공정성도 재정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만 커지고 책임은 사라지는 혼란이 되풀이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공동체의 합의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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