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형식 거리활동가
낙동강은 발원지 강원도 태백을 제외하고는 모든 유역이 경상도에 있어 일명 '영남의 젖줄'로 불린다.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 낙동강은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물류 통로였다. 기록에 따르면 낙동강을 따라 배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총거리인 주운이 총 810리(324㎞)였는데 이 중 380리(152㎞)가 대구·경북에 속했다고 한다.
특히 대구의 사문진, 부산의 구포, 밀양의 삼랑진 등은 낙동강 주운의 핵심 나루터로 쌀, 소금, 어물, 목재 등이 이 강을 통해 운송되었다. 조선은 험준한 산악지형 탓에 바퀴 문화가 발전할 수 없었던 환경이었기에 내륙 수운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문진은 경북 내륙과 부산을 연결하는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로, 지역 상권과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구가 과거 상업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데에는 사문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조선 세종 28년(1446년)에 설치된 물류창고 화원창은 성종 대까지 운영되었으며, 부산과 서울의 중간 지점이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대일무역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개항 이후에도 대구는 내륙 도시 중 가장 먼저 일본 세력이 진출해 침략거점으로 삼았을 만큼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다.
일제강점기, 민족자본 은행인 대구은행을 설립한 은행가 정재학은 사문진을 통해 큰 부를 이룬 인물이다. 1886년, 조선 전역에 콜레라가 창궐해 수백만 명이 사망하자 소금이 특효약이란 소문이 퍼지며 소금값이 수십 배로 폭등했다. 이 시기 그는 사문진을 통한 소금 유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단숨에 대구 3대 거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사문진은 20세기에 들어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는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며 물류 체계가 철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육상 운송이 주를 이루게 되며 사문진의 물류 기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지만, 그 역사적 가치는 여전히 빛나는 중이다.
오늘날 사문진은 주막촌, 유람선, 캠핑장, 공연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해 시민들에게 휴식과 여가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주막촌은 전통 먹거리와 체험을 통해 과거의 정취를 되살렸고, 유람선은 낙동강을 따라 운항하며 아름다운 수변 풍경을 선사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사문진은 과거 나루터의 역사적 의미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축제가 열리는 창조적 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강을 따라 흐르던 물자처럼, 사문진 또한 시간의 궤적을 거슬러 오르며 새로운 가치를 실어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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