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최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정부는 '공직 기강 확립'과 '특정 사건 관련자 색출'을 명목으로 공무원들의 개인 휴대폰 검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실 휴대폰은 사적 대화나 인간관계, 감정과 기억, 취향과 사상의 흐름이 모두 저장된 일종의 디지털 뇌에 가깝다. 이 영역에 대한 접근을 행정 편의로 정당화하려는 순간,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의 경계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만다.
나는 영국에서 오래 생활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국가가 개인을 하나의 번호로 통합해 관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영국에는 주민등록증과 같은 국가 신분증도, 단일 식별번호도 없다. 은행 계좌를 만들거나 의료 서비스를 신청할 때조차 국가는 개인을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로 묶어 관리하지 않는다. 행정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민을 국가의 시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뜨려 두는 것, 그것이 영국 민주주의가 지켜온 기본 철학이다.
2010년 영국 정부는 발급된 국가 신분증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법으로 파기했다. 당시 부통리 닉 클레그(Nick Clegg)는 이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ID 카드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다. 우리는 감시국가를 원치 않는다." 그는 신분증이 가진 본질적 문제를 지적하며, 신분증 폐지야말로 "감시국가를 해체하는 첫 단계"라고 강조한다. 영국이 지켜온 오랜 원칙은 명확하다. 국가는 시민의 개인 정보에 대한 앎의 권리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효율보다 자유, 편의보다 권리라는 측면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주소, 이동 정보, 금융·건강 데이터가 촘촘히 연결된 사회에서 국가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고 더 깊이 파악하고 들여다보려 한다. 신분증 번호나 카드번호를 전화로 주고받는 행위조차 당연해진 일상 속에서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국가는 어디까지 시민을 알아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루쉰의 '아Q정전'은 중요한 문학적 거울로 기능한다. '아Q'는 사회가 부여한 멸시와 규정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스스로를 내세우거나 정의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더 큰 비극은 그 억압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애써 믿는 데서 주어진다는 사실. 루쉰이 말한 통제의 본질은 강압이 아니라, 개인이 억압을 일상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아Q'는 자신이 왜 처형되는지도 모른 채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비극의 핵심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억압을 끝내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민을 지나치게 알고, 시민이 그 감시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통제는 더 이상의 폭력이 아니라 '일상'이 되고 만다.
'휴대폰 검사' 논란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개인의 메시지와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연해지는 순간, 자유는 소리 없이 침식된다. 과거 구소련에서 예술가의 이념과 사상, 표현의 자유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가 '형식주의'라는 명목 아래 악보 위의 영감과 내면의 소리를 억압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대화와 생각 또한 '공직 기강'이란 이름으로 상당 부분 제한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국가가 시민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면, 감시국가는 시민을 의심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Q'의 비극, 즉 자각의 부재와 상실을 기억하는 사회만이 온전한 미래를 지킬 수 있다. 국가는 어디까지 개인을 알아야 하는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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